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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공[歐陽公]~구양금화[驅羊金華]~구양문충[歐陽文忠]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로, 길안(吉安) 영풍(永豐) 사람이며,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육일거사(六一居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중국 송나라의 정치가 겸 문인이다. 추밀부사(樞密府使)・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저서에는 신당서(新唐書)・신오대사(新五代史)・육일시화(六一詩話) 등이 있다. 일찍이 ‘창승부(蒼蠅賦)’를 지어 파리를 미워하기도 하였다. 춘추논의(春秋論議)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구양공춘추론[歐陽公春秋論]  구양공(歐陽公)은 구양수(歐陽脩)이다. 춘추론(春秋論)은 구양수의 대표적인 사론(史論)으로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에도 뽑힌 글이다. 상・중・하 세 편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는 전후 내용이 연결되어 있어 같은 시기에 지어진 한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춘추(春秋) 경문(經文)과 삼전(三傳)의 내용이 다른, 은공(隱公)의 즉위며 조돈(趙盾)과 허 세자(許世子) 지(止)의 사건 등을 들면서 무엇을 위주로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지를 논하였다.

구양관[歐陽觀]  송(宋)나라 여릉(廬陵) 사람으로 자는 중빈(仲賓), 벼슬은 사주(泗州)・면주(綿州)의 추관(推官)을 거쳐 진주 판관(秦州判官)을 역임했다.

구양금화[驅羊金華]  중국 진대(晉代) 사람 황초평(黃初平)은 단계(丹溪) 사람인데, 나이 열다섯에 양을 치다가 도사를 따라 금화산(金華山) 석실(石室)로 가서 수도(修道)하였다. 그 후 40년 만에 그의 형 황초기(黃初起)가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가 만났더니 양은 보이지 않고 흰 돌들만 있었다. 황초평이 “양들은 일어나라.”라고 소리치자, 흰 돌들이 모두 수만 마리의 양으로 변했다 한다. <神仙傳 黃初平>

구양덕[歐陽德]  자는 숭일(崇一), 호는 남야(南野)로 명(明) 나라 강서(江西) 태화(泰和) 사람인데, 가정(嘉靖)의 진사(進士)로서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구양록[歐陽錄]  구양수(歐陽脩)의 기록. 구양(歐陽)은 구양공(歐陽公)으로 송(宋) 나라의 문신이며 학자인 구양수(歐陽脩)를 가리키며, 기록은 그가 삼대(三代) 이래 금석(金石)의 유문(遺文) 1000권을 모아 기록한 것을 이른다. 구양수는 일찍이 집에 장서(藏書)가 만 권이요 금석의 유문을 기록한 것이 1000권이요, 여기에 거문고 하나, 바둑판 하나, 술 한 병 그리고 자신을 합하여 여섯이 하나가 되었다 해서 스스로 육일거사(六一居士)라 호하였다.

구양문충[歐陽文忠]  송나라 구양수(歐陽脩)로,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육일거사(六一居士), 시호는 문충이다. 길주(吉州) 여릉(廬陵) 사람으로,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 태자소사(太子少師)에 이르렀다. 송 인종(宋仁宗) 가우(嘉祐) 2년(1057)에 구양수는 지공거(知貢擧)로 주시관(主試官)이 되어 모두 388명의 진사를 녹취(錄取)하였는데, 이때 소식도 소철(蘇轍), 증공(曾鞏), 장재(張載) 등과 함께 녹취되었다. 구양수는 뒤에 매요신(梅堯臣)에게 보내는 편지에 “소식의 글을 취하여 읽을 때 나도 모르게 땀이 흘렀으니, 장쾌하고 장쾌하다. 노부는 응당 길을 피하여 그에게 한 걸음 뒤로 양보해야 하겠다.[取讀軾書, 不覺汗出, 快哉快哉! 老夫當避路, 放他出一頭地也.]”라고 하였다. <宋史 卷338 蘇軾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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