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 구양수(歐陽脩). 중국 북송(北宋)의 정치가・문인・학자. 호는 취옹(醉翁)・육일거사(六一居士). 강서성(江西省) 여릉현(廬陵縣) 출생. 4살 때 부친을 사별했고, 10세 때 한유(韓愈)의 시문에 심취, 1030년 진사(進士)・관각교감(館閣校勘)이 되었고, 한림학사(翰林學士)・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가 되어, 유명한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했다. 신종(神宗) 때엔 형부(刑部)・병부(兵部) 등의 상서(尙書)에 있었으나, 왕안석(王安石)이 신법(新法)을 실시할 때 청묘법(靑苗法)에 반대, 퇴관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정치가일 뿐 아니라 문인・학자로서 역(易)과 모시(毛詩)의 새 해석, 고문(古文) 부흥, 역사연구・편찬 등에 큰 공헌을 했다. 한유・유종원(柳宗元) 이후 일시 쇠퇴한 고문을 부흥시켜 정통적인 것으로 만들었는데 그의 문장은 우여위비(迂餘委備), 명백창달(明白暢達)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한유에 비해 실명적・분석적이나, 응축도와 강렬성이 적다. 시에서는 매요신(梅堯臣) 등과 친교를 맺었고, 당시 유행하던 서곤체(西崑體)라는 화려한 수사적 시풍을 타파하고 이른바 송시(宋詩)를 창조했다. 그는 시문(詩文) 양면에서 송대 문운(文運)을 개척했고, 또 사학과 고고학 방면의 업적도 적지 않다. 육일시화(六一詩話)는 시평론의 한 형식적인 시화(詩話)의 효시이며, 또 우수한 수필집 귀전록(歸田錄), 모란(牡丹)을 논한 낙양모란기(洛陽牡丹記) 등의 저서가 있다. 역사적 저술로서 오대사기(五代史記)를 편찬했고, 고고학에 관한 저술로 집고록(集古錄) 10권이 있으며, 전집 구양문충공집(歐陽文忠公集) 13권, 부록 5권이 있다. 태사(太師)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 송(宋)나라 인종(仁宗)・영종(英宗)・신종(神宗) 때의 문신 구양수(歐陽脩)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육일거사(六一居士)・화방재(畵舫齋),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벼슬은 한림원 시독학사(翰林院侍讀學士)・병부 상서(兵部尙書)・태자소사(太子少師)를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청주지주(靑州知州)・개봉지부(開封知府) 등을 지냈는데 정치가 너그럽고 간편하였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하나. 저서에는 신당서(新唐書)・신오대사(新五代史)・모시본의(毛詩本義)・집고록(集古錄)・문충집(文忠集) 등이 있다. <宋史 卷319 歐陽脩列傳> <宋元學案 卷4 廬陵學案 歐陽脩>
구양부[歐陽賦] 송(宋) 나라 때 구양수(歐陽脩)가 지은 추성부(秋聲賦)를 가리킨다.
구양불면사어구[歐陽不免死於賕] 구양흡(歐陽歙)이 풀려나지 못하고 뇌물죄로 죽음. 구양흡은 자가 정사(正思)로 낙안(樂安) 천승(千乗) 사람이다. 선조 구양생(歐陽生) 때부터 복생(伏生)의 상서(尚書)를 연구하여 8세 동안 대대로 박사(博士)를 지냈다. 구양흡은 당시 유종(儒宗)으로 추앙받으면서 광무제가 즉위하자 하남윤(河南尹)에 등용되었고, 여남 태수(汝南太守)가 되어서는 제생(諸生)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였으며 얼마 후에 대사도(大司徒)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여남 태수로 있으면서 뇌물을 받은 일로 인해 하옥되자, 평소 가르쳤던 제생 1천여 명이 궐문 밖에서 구양흡을 용서해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도량이 넓은 광무제도 오직 뇌물죄만큼은 용서가 없었던 탓에, 결국 풀려나지 못하고 옥에서 죽고 말았다. <後漢書 卷109上 儒林列傳 歐陽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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