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실[軍實] 군사력. 병기, 군량, 장비 따위를 이름. 전쟁. 전쟁에서 얻은 것. 곧 전리품. 군중(軍中)의 병거(兵車)・무기(武器) 등과 작전(作戰)에서 노획(鹵獲)한 각종 물건을 이른다.
군실[軍實] 군대의 사병들을 이른다.
군실[君實] 군실은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자이다. 사마광이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다가 뜻이 맞지 않자 판서경어사대(判西京御史臺)를 자청하여 낙양(洛陽)으로 돌아가서 15년간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천하 사람들이 모두 ‘진재상(眞宰相)’이라 하였고, 촌로들도 모두 ‘사마 상공(司馬相公)’이라 불렀으며, 부녀자들도 그가 군실인 줄을 알았다 한다. <宋史 卷336 司馬光傳>
군실[君實] 군실은 송조(宋朝)의 명신 사마광(司馬光)의 자인데, 그는 일찍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강력히 배척하여 폐지하였고, 특히 편년사(編年史) 중에 가장 으뜸으로 일컬어지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저술하기도 했다. 소식(蘇軾)이 지은 사마군실독락원(司馬君實獨樂園) 시에 “아이들은 군실을 외우고, 노복들은 사마를 알고 있네.[兒童誦君實 走卒知司馬]”라고 하였는데, 이름이 높이 나 아이들까지도 안다는 뜻이다.
군실[君實] 사마광(司馬光)의 자이다. 사마광은 나이가 여든에 가까운 맏형을 엄부(嚴父)처럼 섬기고, 어린아이처럼 돌보았는데, 식사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배고프지 않느냐고 물었고, 날씨가 다소 차가우면 그 등을 어루만지면서 옷이 얇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小學 善行>
군실[君實] 사마광(司馬光)의 자이다. 산서성(山西省) 하현(夏縣) 사람으로 호는 우부(迂夫)・우수(迂叟),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속수 선생(涑水先生)이라고도 하며, 죽은 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司馬溫公)이라고도 한다. 신종(神宗)이 왕안석(王安石)을 발탁하여 신법(新法)을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하여 새로 임명된 추밀 부사(樞密副使)를 사퇴하고 지방으로 나갔다. 신종이 죽은 뒤 중앙에 복귀하여 정권을 담당하였다. 저서에 자치통감(資治通鑑), 속수기문(涑水紀聞), 사마문정공집(司馬文正公集) 등이 있다.
군실가액망[君實加額望] 군실은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자이고, 가액은 두 손을 이마에 대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의 하나이다. 사마광이 신종(神宗) 때 재상으로 재직하던 중 1084년 3월에 황제가 승하하여 대궐에 들어가 임곡(臨哭)하였는데, 대궐을 경비하는 군사들이 그를 바라보고 모두 두 손을 이마에 갖다 대고 말하기를 “이분은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하였다 한다. <宋史 卷三百三十六 司馬光傳>
군실구분[君實九分]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재능이 천하 재능의 구분(九分)을 지녔다는 것을 말한다.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에 “소강절(邵康節 소옹(邵雍))이 또 말하기를 ‘그대(사마광)는 실로 구분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하였다.[康節又言 君實九分人也]”라는 기록이 보인다. 유극장(劉克莊)의 화오경재시랑(和吳警齋侍郞)시에 “온공의 재능은 아홉 사람 분량이다.[溫公才做九分人]”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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