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향보[軍餉保] 군량을 보충하기 위해 만든 보인을 말한다. 이들은 병역의 면제를 받고 그 대가로 군비에 소요되는 미포(米布)를 바쳤다.
군향소상아향진[君向瀟湘我向秦] 당나라 때 시인 정곡(鄭谷)의 과주도(瓜州渡)라는 시에 “양자강 머리엔 버들 늘어진 봄, 수심에 겨운 버들 꽃 속에 강 건너는 사람. 몇 가닥 풍적 소리에 이별한 정자는 멀어지고, 그대는 소상으로 나는 진 땅으로 향하네.[揚子江頭楊柳春 楊花愁殺渡江人 數聲風笛離亭晩 君嚮瀟湘我嚮秦]”라고 나온다. 서로 멀리 떨어짐을 말한다.
군현사당고[羣賢死黨錮] 군현(羣賢)들이 당고(黨錮)로 죽음. 군현(羣賢)은 현인이라 칭함 받는 여러 사람들의 무리를 이르고, 당고(黨錮)는 당인금고(黨人禁錮)의 줄임말로, 당인이란 정치적으로 결합을 맺은 유가 지식인을 말하며, 금고란 관리로 임명되는 권리를 박탈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고란 유가 지식인이 관리로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며, 이를 주도한 세력은 환관이었다. 동한(東漢) 환제(桓帝) 때에 환관(宦官)이 정권을 주도하자, 사대부였던 이응(李膺)・진번(陳蕃) 등이 태학생 곽태(郭泰)・가표(賈彪) 등과 연합하여 환관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러나 환관들은 그들이 붕당을 지어 조정을 비난했다고 무고하여 이응 등 200여 명을 체포하여 종신금고형을 받게 하였고, 영제(靈帝) 때에 이응 등이 다시 기용되어 대장군 두무(竇武)와 모의하여 환관을 주벌하려 하였으나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이응 등 100여 명이 피살되고 말았다. 그 후 이 사건을 ‘당고지화(黨錮之禍)’라고 불렀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군현지병[郡縣之兵] 조정에서 군현(郡縣)으로부터 초모(招募)하는 금군(禁軍)을 가리킨다. 송대(宋代)의 군대에는 대략 세 종류가 있었다. 천자(天子)의 위병(衛兵)은 京師(京師)를 수위(守衛)하는 일을 책임지고 번(番)을 나누어 돌아가며 변경을 수수(戍守)하였으니 이를 ‘금군(禁軍)’이라 칭하고, 각 주(州)의 진병(鎭兵)은 지방의 역사(役使)를 제공하였으니 이를 ‘상군(廂軍)’이라 칭하고, 별도로 지방에서 단련 무장하는 병정이 있었으니 이를 ‘향병(鄕兵)’이라 칭하였다. 송 태조(宋太祖)는 만당(晩唐) 오대(五代)의 번진(藩鎭)이 병권을 쥐고 위세를 부리던 것에 교훈을 받아서 사방의 경병(勁兵)을 거두어다가 경기(京畿)에 군영(軍營)을 열립(列立)시켜 숙위(宿衛)에 대비하고, 번(番)을 나누어 둔수(屯守)하여 변계를 방어하였다. 뒤에도 각 지방 진영(鎭營)의 정예한 병정을 계속 금군(禁軍)으로 편입시켰다.
군현지토병[郡縣之土兵] 지방군(地方軍)인 상군(廂軍)을 이른다. 송대(宋代)의 병제(兵制)는 전국의 군대를 금군(禁軍), 상군(廂軍), 향군(鄕軍), 번군(藩軍)의 네 가지로 나누었는데, 금군(禁軍)은 황제의 친위군인 중앙군으로 수도(首都)에 주둔하다가 윤번제로 지방 주현(州縣)에 나가 근무하였다. 상군(廂軍)은 지방군(地方軍)으로 주(州)의 수비를 주임무로 하였으며, 향군(鄕軍)과 번군(藩軍)은 비상설 조직으로 향군(鄕軍)은 각 지역의 장정(壯丁)을 뽑아 자신의 지역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번군(藩軍)은 귀순한 이민족의 병사로 변경을 수비하게 하였다.
군현천하[郡縣天下] 진시황(秦始皇)이 6국을 통일한 뒤에 이사(李斯)의 주의(奏議)에 따라 주(周) 나라 때부터 내려오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영토를 36군(郡)으로 나누었다. 이것이 곧 군현정치(郡縣政治)의 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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