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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숙[霍叔]~곽숭[郭崇]~곽숭도[郭崇韜]


곽숙[霍叔]  주 무왕의 아들이자 주공의 아우로, 성왕 때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추방당했다.

곽숭[郭崇]  송(宋)나라 금성(錦城) 사람으로 초명은 숭위(崇威)였는데 주조(周祖)의 이름자를 피하여 숭(崇) 자만 썼다. 벼슬은 후당(後唐) 청태(淸泰) 연간에 응주기군도교(應州騎軍都校), 송초(宋初)에 중서령(中書令)을 역임했다. <宋史 卷255 郭崇列傳>

곽숭도[郭崇韜]  곽숭도(郭崇韜)는 오대(五代) 후당(後唐) 사람으로 벼슬은 병부상서(兵部尙書), 추밀사(樞密使)에 이르렀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923)에 장종(莊宗)에게 권하여 변주(汴州)를 습격하고 양(梁)나라를 멸하게 하여 모의(謀議)로 좌공(佐功) 제1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철권(鐵券 공훈을 기록한 책)을 하사받고 시중(侍中)과 성덕군절도사(成德軍節度使)를 제수받았다. 곽숭도(郭崇韜)는 국가에 충성을 다하여 일을 당하면 간절히 간언하였기 때문에 환관(宦官)과 영인(伶人)이 용사(用事)에 불편을 느꼈다. 곽숭도(郭崇韜)는 본래 환관(宦官)을 질시하였으므로 환관(宦官) 마소굉(馬紹宏)·이종습(李從襲)·향연사(向延嗣) 등이 그를 원망하여 그를 참소(讒訴)하기 시작하였다. 동광(同光) 3년에 곽숭도(郭崇韜)는 초토사(招討使)로서 위왕(魏王) 이계급(李繼芨)을 따라 촉(蜀:전촉前蜀)을 치러 나가 있었는데, 이때에 유후(劉后)는 환관(宦官) 마언규(馬彦珪)를 시켜 조서(詔書)를 위조해 이계급(李繼芨)에게 내려서 곽숭도(郭崇韜)를 죽이게 하였다. 곽숭도(郭崇韜)가 죽은 뒤에는 조정에 직언하는 충신(忠臣)이 없었으며, 따라서 이사원(李嗣源 : 明宗명종)의 반란을 초래하여 결국 왕위(王位)를 이사원(李嗣源)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곽숭도[郭崇韜]  곽숭도는 후당(後唐) 사람인데, 당 장종(唐莊宗)을 도와서 후량(後粱)을 멸하고 좌명공(佐命功) 1등으로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숭도는 몸은 비록 귀하였으나 문벌이 한미하여 당 나라 명신 곽자의(郭子儀)를 자기 선조라고 성묘했다는 말이 있다.

곽숭도[郭崇鞱]  오대(五代) 때의 후당(後唐) 사람. 그가 추밀사(樞密使)가 되어 용사(用事)할 때 재상(宰相) 두로혁(豆盧革) 등이 다 그에게 아부하였다. 하루는 그에게 “분양왕(汾陽王: 당 나라 곽자의郭子儀의 봉호封號)은 본시 태원(太原) 출신으로 화음(華陰)에 이주(移住)하였고, 공(公)은 대대로 안문(雁門)에 살았는데, 어떻게 분양왕의 지파(枝派)가 되는가?”고 묻자, 그는 “난리를 만나 보첩(譜牒)을 유실하였다. 선인(先人)의 말에 의하면, 본인은 분양왕의 4대손이 된다.”고 하였다. <舊五代史 卷57> 곽자의(郭子儀)는 당(唐) 나라 때의 명장(名將)으로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다. 그래서 곽분양(郭汾陽)이라고도 한다.

곽숭도[郭崇韜]  오대(五代) 시대 남당(南唐) 때에 곽숭도가 한창 용사(用事)할 적에 재상 두로혁(豆盧革) 등이 그에게 아부하여, 그의 성이 곽(郭)인 때문에 이를 인하여 그를 곽자의(郭子儀)의 후손이라고 부추기자, 곽숭도는 마침내 그것을 사실로 여기었다. 그래서 뒤에 그가 촉(蜀)을 정벌하러 나갔을 때, 곽자의의 묘(墓)를 지나다가 말에서 내려 통곡(慟哭)을 하고 갔으므로, 그 사실을 들은 이들이 웃음거리로 삼았다는 고사가 있다.<新五代史 卷24 郭崇韜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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