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래[歸來]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말로, 전원으로 돌아가 소요자재함을 말한다.
귀래벽완[歸來璧完] 사신의 임무를 잘 수행하고 돌아온다는 뜻이다. 전국(戰國) 시대 때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이 초(楚)나라의 화씨벽(和氏璧)을 얻었는데,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이를 빼앗고자 하여 거짓으로 15개의 성과 바꾸자고 하였다. 이에 조나라에서는 인상여(藺相如)가 가게 되었는데, 인상여는 화씨벽을 가지고 가 진나라에서 성을 주지 않으면 화씨벽을 깨뜨리겠다고 위협하여 마침내 화씨벽을 그대로 다시 조나라로 가지고 돌아왔다. <史記 卷81 藺相如列傳>
귀래사[歸來辭] 문장(文章)의 이름인데, 진(晉) 나라 때의 고사(高士) 도잠(陶潛)이 평택 영(彭澤令)이 되었다가 군(郡)에서 독우(督郵)가 나와 순시를 한다고 하자 “내 어찌 오두미(五斗米) 때문에 향리 소인(鄕里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느냐.”라 하고, 그날로 사직하고 이 글을 지었다 한다.
귀래서갑자[歸來書甲子] 돌아갔다는 것은 곧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간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은 평소 자기가 저술한 문장(文章)에 반드시 연월(年月)을 썼는데, 동진(東晉)의 마지막 임금인 안제(安帝)의 연호(年號) 의희(義煕)까지는 분명히 썼고, 그 후 송 무제(宋武帝) 때부터는 연호를 쓰지 않고 갑자(甲子)로 일진(日辰)만을 기록했던 데서 온 말이다. <南史 卷75 隱逸上 陶潛>
귀래송백상[歸來松柏嘗] 장량이 한 고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는 “이제는 인간(人間)의 일을 모두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서 노닐고 싶다.”고 하고, 마침내 벽곡(辟穀)을 배우고 도인술(導引術)로 몸을 가볍게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벽곡은 화식(火食)을 하지 않고 솔잎, 대추, 밤 따위를 날것으로 조금씩 먹고 사는 것을 말하고, 도인술이란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에 의하여 수족(手足)을 이리저리 굴신(屈伸)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을 말한다.
귀래장읍대장군[歸來長揖大將軍] 한 무제(漢武帝) 때 대장군 위청(衛靑)이 위세가 대단하였으나, 급암(汲黯)은 그를 볼 적에 읍(揖)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았던 고사에서 온 말로, 남자의 기개(氣槪)를 비유한 말이다.
귀래정[歸來亭]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이굉(李浤)이 안동(安東)의 동쪽 와부탄(瓦釜灘) 위에 지은 정자 이름이다.
귀래탄무어[歸來嘆無魚] 전국 시대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문객(門客) 풍환(馮驩)이 “긴 칼아, 돌아가자. 밥상에 생선 없구나.”라고 하였다는 옛말이 있다.
귀래탄장협[歸來彈長鋏] 전국 시대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문객(門客) 풍환(馮驩)이, 좌우로부터 천시를 받아 음식 제공이 형편없자, 그가 기둥에 기대어 손으로 검(劍)을 치면서 노래하기를 “장협아, 돌아가야겠다. 먹자도 고기가 없구나.[長鋏歸來乎 食無魚]”라고 하므로, 맹상군이 좌우에게 명하여 음식 제공을 잘하도록 했는데, 뒤에 또 검을 치면서 노래하기를 “장협아, 돌아가야겠다. 나가려도 수레가 없구나.[長鋏歸來乎 出無輿]”라고 하므로, 맹상군이 또 그가 출입할 때에 수레를 제공하도록 해 주었던 고사가 있다.
귀래폐진흑초구[歸來弊盡黑貂裘] 외지(外地)에서 오랜만에 돌아왔다는 뜻으로 소진(蘇秦)이 진(秦) 나라에서 흑초구(黑貂裘)가 해지도록 있다가 왔다는 고사에서 인용된 말이다. <戰國策 秦策>
귀래학[歸來鶴] 수신후기(搜神後記)에 정령위(丁令威)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어 요동으로 돌아와 화표주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은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라고 한 데서, 옛날에 정령위가 학으로 화해 돌아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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