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후[歸厚] 논어(論語)에 공자가 이르기를 “죽은 이를 마지막 보내는 데에 삼가고 조상을 추모(追慕)하면 백성들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오리라.[慎終追遠民德歸厚矣]”라고 하였다.
귀후서[歸厚署] 나라의 관곽(棺槨)를 만들고 장례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관청이다. 관곽(棺槨)의 제조, 화매(和賣)와 예장(禮葬)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사무를 관장하는 종6품 아문(衙門)이다. 조선조 태종 6년(1406)에 설치하였다가 정조 원년(1777)에 혁파하여 그 업무를 선공감(繕工監)에 이관하였다. 장(長)은 별제(別提)이다.
귀후서[歸厚署] 관곽(棺槨)의 제조와 예장(禮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처음에는 관곽색(棺槨色)이라 하였다가 시혜소(施惠所), 귀후소(歸厚所) 등으로 고쳤으며 정조(正祖) 때 선공감(繕工監)에 붙였고 제조(提調), 별제(別提) 등의 관원을 두었다.
귀후악후[鬼侯鄂侯] 사기(史記)에는 귀후(鬼侯)가 구후(九侯)로 되어 있는데 봉지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임장현(臨漳縣)이라 하였다. 악후(鄂侯)는 그 봉지가 하남성(河南省) 심양현(沁陽縣)이었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주(紂)가 서백(西伯) 희창(姬昌: 문왕文王)과 구후(九侯)와 악후(鄂侯)를 삼공으로 삼았다. 구후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을 주에게 바쳤다. 그러나 구후의 딸이 음탕한 짓을 싫어하자 주가 노하여 그녀를 죽이고, 구후를 젓갈로 담갔다.[以西伯昌·九侯·鄂侯爲三公. 九侯有好女入之紂, 九侯女不熹淫, 紂怒殺之, 而醢九侯.]”라고 한 데에 보인다. 또 사기(史記) 노중련열전(魯仲連列傳)에서 “구후에게 딸이 있었는데 아름다워서 주에게 바쳤다. 그러나 주는 못생겼다고 여겨서 구후를 젓갈로 담갔다.[九侯有子而好, 獻之於紂, 紂以爲惡, 醢九侯.]”라고 한 노중련의 말에도 보인다.
귀흥[歸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을 이른다.
귀흥삼추[歸興三秋] 가을 들어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다. 계응(季鷹)은 진대(晉代)의 문인 장한(張翰)의 자이다. 장한은 낙양(洛陽)에 들어가 동조 연(東曹掾)으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을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자기 고향인 강동(江東) 오중(吳中)의 순챗국과 농어회를 생각하면서 “인생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중하거늘, 어찌 수천 리 타관에서 벼슬하여 명작을 구할 수 있겠는가.[人生貴得適志 何能羈宦數千里 以要名爵乎]” 하고, 마침내 수레를 명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晉書 卷92 張翰列傳>
귀흥진초화[歸興趁椒花] 돌아가서 새해를 맞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표현한 말이다. 산초 꽃은 매화(梅花)보다 일찍 피는데, 진(晉) 나라 유진(劉瑧)의 처(妻) 진씨(陳氏)가 언제나 새해가 되면 초화송(椒花頌)을 지어 한 해를 기원했다고 한다. <晉書 劉瑧妻陳氏傳> 두보(杜甫)의 시 ‘십이월일일(十二月一日)’에 “매화꽃을 가져다가 시름스런 눈을 놀라게 하지 못하니, 또 산초꽃을 가져야 먼 하늘을 아름답게 여긴다.[未將梅蘂驚愁眼 要取椒花媚遠天]”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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