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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저[金剛杵]~금거우마[襟裾牛馬]~금거적불[金車赤紱]~금거화[禁擧火]


금강안[金剛眼]  불교의 용어로, 안광(眼光)이 예리하여 사물의 원형(原形)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말한다.

금강역사[金剛力士]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흔히 인왕(仁王)이라 부른다. 한국의 사찰에서는 대개 수문신장(守門神將)으로 사찰의 입구 양쪽에 서 있다.

금강저[金剛杵]  범어로 벌절라(伐折羅)로서 본디 인도의 병기(兵器)를 삼았는데 밀종(密宗)이 빌려서 견리(堅利)의 지(智)를 표(標)하여 번뇌를 끊고 악마를 굴복시키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인왕경 상(仁王經上)에 “手持金剛杵者 標起正智 猶如金剛”이라 하였다.

금강저[金剛杵]  불가의 용어인데, 오고저(五鈷杵)라고도 한다. 승려들이 수법(修法)할 때에 쓰는 도구의 하나이다. 쇠나 구리로 만드는데, 양 끝을 한 가지로 만든 것을 독고(獨鈷), 세 가지로 만든 것을 삼고(三鈷), 다섯 가지로 만든 것을 오고(五鈷)라 한다. 저(杵)는 본디 인도의 무기이다. 금강저는 보리심(菩提心)의 뜻이 있으므로 이를 갖지 않으면 불도 수행을 완성하기 어렵다 한다.

금강저[金剛杵]  원래 인도의 병기인데 불가에서 번뇌를 끊고 악마를 조복받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번뇌를 끊고 악마를 굴복시키는 병기로서 견고해서 부서지지 않는 신통력을 말한다.

금강정[錦江亭]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영월읍에 있는 정자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강원도 영월군에 “금강정은 금장강(錦障江)의 언덕 절벽 위에 있다. 선덕(宣德) 무신년(戊申年, 1428)에 군수 김부항(金復恒)이 세운 것이다. 동쪽으로는 금장강에 임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금봉연(金鳳淵)을 바라본다.”라고 보인다.

금거[襟裾]  ‘옷섭과 옷자락’이라는 뜻으로, 옷을 입음을 이르는 말. 옷의 깃이라는 뜻으로, 가슴 속을 이르는 말.

금거[襟裾]  전금후거(前襟後裾)의 준말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혹은 형제간의 긴밀한 관계를 뜻한다.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 형제(兄弟)에 “자식들이 어릴 적에, 부모는 왼쪽에서 손잡고 오른쪽에서 끌며, 앞으로는 품에 안고 뒤로는 소매를 잡는다. 밥은 같은 밥상에서 먹고, 옷은 물려 입으며, 공부는 형이 보던 책을 그대로 쓰고, 놀 때는 같은 방소로 함께 간다.[方其幼也 父母左提右挈 前襟後裾 食則同案 衣則傳服 學則連業 遊則共方]”라는 말이 나온다.

금거우마[襟裾牛馬]  옷 입은 마소. 한유(韓愈)의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 시에 “사람이 고금의 의리 알지 못하면 마소에다 사람 옷 입힌 격이라.[人不通古今 馬牛而襟裾]”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으로, 무식하여 사리를 모르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昌黎先生集 卷6>

금거적불[金車赤紱]  주역(周易) 곤괘(困卦) 구사에 “오기를 천천히 하는 것은 황금 수레[金車]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부족하지만 끝이 있으리라.[來徐徐 困于金車 吝 有終]”라고 하였고, 주역(周易) 곤괘 구오(九五)에 “코를 베고 발꿈치를 베는 것이다. 적불(赤紱)에 곤궁하나 곧 차차 기쁜 일이 있을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롭다.[劓刖 困于赤紱 乃徐有說 利用祭祀]” 하였다. ‘적불’은 무릎을 덮는 붉은색의 폐슬(蔽膝)인데, 대부(大夫)가 착용하는 복장이다. 곧 높은 관직과 그에 걸맞은 조정의 대우에 연연해한다는 뜻이다.

금거화[禁擧火]  중국에서 한식날이 되면, 이날 하루 동안 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진 문공(晉文公)이 19년 동안이나 타국을 떠돌며 고생할 때 개자추(介子推)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요리를 할 정도로 충성을 다하였다. 뒤에 문공이 진나라로 돌아와 즉위한 다음, 자신을 모시며 고생한 사람에게 상을 내렸다. 이때 개자추의 공을 잊고 봉록을 내리지 않아, 개자추가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綿山)에 은거하였다. 뒤늦게 진 문공이 산으로 찾아갔으나 개자추가 나오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를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질렀는데,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나무를 껴안고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에 문공이 크게 슬퍼하여, 산 아래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가 불에 타 죽은 날에는 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날이 바로 한식(寒食)이다. 면산은 그 후 개산(介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24年> <新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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