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루[黔婁] 검루. 춘추(春秋)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이다. 노공공(魯恭公)이 그의 어짊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정승을 삼으려 하였으나 사양하였고, 제왕(齊王)도 그를 예로 초빙하여 경(卿)을 삼으려 하였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매우 가난하여 죽은 뒤에 베이불이 작아서 시체를 다 덮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삐뚤게 덮으면 되겠다고 하자, 그의 아내는 “삐뚤게 덮어 남는 것보다는 반듯하게 하여 모자라는 것이 낫다.” 하였다. <高士傳>
금루[金縷] 금실로 지은 옷을 가리킨다. 금실을 가리킨다. 봄날의 버드나무 가지를 가리키기도 한다.
금루[金縷] 금루곡(金縷曲) 혹은 금루의(金縷衣)의 준말로, 남자의 욕정을 부추기며 유혹하는 노래 이름이다. 하신랑(賀新郞), 유연비(乳燕飛)라고도 한다. 당(唐)나라 때 금릉(金陵)의 소녀(少女) 두추랑(杜秋娘)이 15세에 이기(李錡)의 첩(妾)이 되었는데, 일찍이 이기를 위해 사(詞)를 지어 노래하기를 “그대에게 권하노니 금루의를 아끼지 말고, 모쪼록 젊은 시절을 아끼시기를. 꽃이 피어 꺾을 만하면 곧바로 꺾어야지, 꽃 없는 때에 공연히 가지만 꺾지 마소서.[勸君莫惜金縷衣 勸君須惜少年時 花開堪折直須折 莫待無花空折枝]”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당나라 두목(杜牧)의 두추랑시(杜秋娘詩) 서문(序文)과 자주(自註)에 나온다. <全唐詩 卷520>
금루[金縷] 거문고 악곡의 이름으로 금루곡(金縷曲) 또는 금루의(金縷衣)라고도 한다. 당나라 함통(咸通) 연간에 회남(淮南) 이공(李公)이 강에서 놀 때 뱃사공이 상앗대를 잘못 놀려 이공의 시녀(侍女) 옷에 물이 튀기자 이공이 안색을 붉혔다. 마침 자리를 함께했던 막좌(幕佐) 배여경(裴餘慶)이 문득 이공에게 시를 지어 바치기를 “아황처럼 고운 얼굴에 비단옷이요, 물총새 깃털 장식 옥비녀에 스치네. 물방울 튀겨 비단 저고리 젖었으니, 아마도 무산 신녀가 저녁 비에 돌아왔나.[半額鵝黃金縷衣 翠趐浮動玉釵垂 從敎水濺羅襦濕 疑是巫山行雨歸]”라고 하였다. <天中記>
금루가[金縷歌] 옛날 악곡 이름으로, 금루의(金縷衣)・금루곡(金縷曲) 등으로도 불린다. 당(唐) 나라 때 금릉(金陵)의 소녀(少女) 두 추랑(杜秋娘)이 15세에 이기(李錡)의 첩(妾)이 되었는데, 그가 일찍이 이기를 위해 사(詞)를 지어 노래하기를 “주군께 권하노니 금루의를 아끼지 말고, 모름지기 소년 시절을 아껴야 하리. 꽃이 피어 꺾을 만하면 바로 꺾어야지, 꽃 없는 때에 빈 가지만 꺾지 마소서.[勸君莫惜金縷衣, 勸君須惜少年時. 花開堪折直須折, 莫待無花空折枝.]”라고 하였다.
금루곡[金縷曲] 곡조(曲調) 이름으로 금루의(金縷衣)라고도 한다. 당(唐)나라 금릉(金陵)의 소녀(少女) 두추랑(杜秋娘)이 15세에 이기(李錡)의 첩(妾)이 되었는데, 이기를 위해 사(詞)를 지어 노래한 일이 있었다. 그 곡에 “주군께 권하노니 금색 실로 만든 옷을 아끼지 말고, 모름지기 소년 시절을 아껴야 하리. 꽃이 피어 꺾을 만하면 바로 꺾어야 하니, 꽃 없어진 뒤에 부질없이 가지만 꺾지 마소서.[勸君莫惜金縷衣 勸君須惜少年時 花開堪折直須折 莫待無花空折枝]”라고 하였다.
금루곡[金縷曲] 곡조(曲調) 이름이다. 곽옥(郭鈺)의 시에 “술에 취한 연분홍 소매 금루곡을 노래하네.[紅袖醉歌金縷曲]”라고 하였다.
금루곡[金縷曲] 악곡(樂曲)의 이름으로, 하신랑(賀新郞), 유연비(乳燕飛)라고도 한다.
금루비파[金縷琵琶] 금실로 만든 비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