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錦文] 금자서(錦字書)와 같은 뜻으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편지를 말한다. 전진(前秦) 두도(竇滔)의 처 소혜(蘇蕙)가 유사(流沙)로 쫓겨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비단 옷감 위에 회문시(廻文詩)를 지어 보낸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列女傳 竇滔妻蘇氏>
금문[金文]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말한다. 종(鐘)이나 솥 등에 새겨있다 하여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들은 주로 덕과 영광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하는 것과 귀족들의 제사・전쟁 등에 관한 기록이 많다. 갑골문보다 글씨가 정교하고 균형이 잡혔으며 획이 부드럽다. 세공 기술이 발달하기도 하였지만 이미 붓과 같은 필기도구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금문[錦紋] 비단결 무늬라는 뜻이다.
금문[金門] 금명문(金明門). 당(唐) 때의 궁문 이름이다. 그 안에 황제의 조칙을 대기하는 한림원(翰林院)이 있었다. 한(漢)나라 때는 금마문(金馬門)이라고 했다.
금문[金門] 한대(漢代) 미앙궁(未央宮)의 문 이름. 문 옆에 구리로 만든 말이 있어서 금마문(金馬門)이라 불렀고 금문(金門)은 약칭이다. 한나라 때 학사들을 초대하던 곳이었는데, 후에는 한림원이나 한림학사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금문[金門] 금마문(金馬門)의 준말이다. 한무제(漢武帝)가 학사(學士)로 하여금 금마문에서 대조(待詔)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였다. 미앙궁(未央宮) 앞에 동마(銅馬)가 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진사왕전(陳思王傳)에 “금문을 밀치고 옥계(玉階)를 밟았다.”하였고,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에 “歷金門上玉堂有日”이라 하였다.
금문[金門] 금마문(金馬門)이라고도 한다. 한(漢)나라 궁궐 문의 이름인데, 학사(學士)들이 조서(詔書)의 하달을 기다리던 곳이다. 사기(史記) 권126 골계열전(滑稽列傳)에 “금마문이라는 것은 환서문(宦署門)인데, 그 문 곁에 동마(銅馬)가 있기 때문에 금마문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금규(金閨)로도 약칭하였다. 임금과 가까운 곳을 말한다. <文選 江淹 別賦>
금문다간삽[今文多艱澁] 금문은 금문상서(今文尙書)를 말한다. 진 시황 때 유가 경전의 소지를 금하는 명이 내려지자 복생(伏生)이 서경(書經)을 벽속에 감추었다. 한나라에 들어와 복생이 그 책을 찾았으나 그중 수십 편의 글이 망실되고 29편만 남게 되었다. 이것이 금문상서(今文尙書)인데, 한나라 당시 문자였던 예서로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뒤에 공자의 옛집을 수리하던 중 벽 속에 간직된 완전한 서경(書經)을 얻었다. 이것이 고문상서(古文尙書)인데, 춘추 시대 문자였던 주서(籒書)로 쓰였기 때문이다. 공안국이 정리하였다. 이중 복생의 금문 상서(尙書)는 문장이 난해하고 껄끄럽기로 유명하다. 이에 대해 주자는 일찍이 ‘한나라 유학자들은 복생의 상서(尙書)를 금문이라 하고, 공안국의 상서(尙書)를 고문이라고 하였다. 지금 살펴보니, 금문에는 간삽한 곳이 많고 고문은 반대로 평이하다.[漢儒以伏生之書爲今文 而謂安國之書爲古文 以今考之 則今文多艱澁 而古文反平易]’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33 雜著 尙書>
금문객[金門客] 한림학사(翰林學士)의 별칭으로 쓰는 말이다.
금문고문[今文古文] 일찍이 상서(尙書)는 금문(今文), 고문(古文), 위고문(僞古文) 3종으로 전수되어 왔다. 금문은 한예(漢隷)로, 고문은 선진(先秦) 고전(古篆)으로 쓰여진 책을 말한다. 이는 문자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경의(經義)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고문과 금문 양파(兩派)로 나뉘어지고 있다. 금문상서(今文尙書)는 모두 28편이며 복생(伏生)으로부터 전수되어 왔다. 사기(史記)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을 살펴보면 “복생은 진시황 때 박사(博士)였다. 진시황이 책을 불태우자, 복생은 벽 속에 책을 숨겨 놓았다가 한 나라가 평정되었을 때, 다시 그 책을 찾았으나 수십 편을 잃어버리고 29편만을 찾아 상서(尙書)가 전해졌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한 29편이란 고명(顧命) 1편을 고명과 강왕지고(康王之誥)로 나누어 2편으로 한 것이다. 이처럼 나누면 29편이 되고 고명과 강왕지고를 하나로 합하면 28편이 된다. 고문상서(古文尙書)는 선진 고문자(古文子)로 쓰여진 것 2종을 말한다. 그 하나는 하간헌왕(河間獻王)의 소장본으로 전수되지 못하여 한대(漢代)에 이미 잃어버렸고, 또 다른 하나는 공자의 집 벽 속에서 찾아낸 것으로 금문상서에 비해 16편이 더 수록되어 있다. 이를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얻어 조정에 올렸으나 공안국이 무고(巫蠱)를 당함으로써 학관(學官)에 나열되지 못하였다. 이것이 세칭(世稱) ‘공벽서(孔壁書)’ 고문상서이다. ‘위고문(僞古文)’은 고문상서의 위작으로 이 또한 2종이 있다. 하나는 서한(西漢)의 장패(張覇)가 지었다는 102편으로 이미 유실되어 전해 오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동진(東晉)의 매색(梅賾)이 바친 고문상서 58편으로, 공안국의 전(傳)까지 함께 바쳤는데, 이 공안국의 전은 위작한 것이어서 엄격히 말하면 상서(尙書) 위공전(僞孔傳)이다. 여기에서 말한 58편은 복생의 금문상서 29편을 33편으로 나누고 이에 위작된 25편을 합하여 말한 것이다. 이것이 현재 통행되는 상서(尙書) 위공전이다. <國學導讀叢編 書經導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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