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옥서[金門玉署] 금문은 금마문(金馬門)으로 궐문(闕文)을 이르고, 옥서는 옥당(玉堂)과 같은 말로 고귀한 부서를 이르는바 조선조에서는 예문관이나 홍문관을 지칭하였다.
금문우객[金門羽客] 북송 때 도사 담자소(譚紫霄)가 남당(南唐) 보대(保大) 연간에 ‘금문우객’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은 데서 유래하였다. ‘금문’은 한(漢)나라 궁궐의 금마문(金馬門)을, ‘우객’은 도사를 이른다. <十國春秋 閩10 譚紫霄列傳>
금문우객[金門羽客] 고려 예종(睿宗) 8년(1113)에 전 원외랑(員外郞) 곽여(郭輿)를 불렀다. 곽여가 오건(烏巾)을 쓰고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항상 금중(禁中)에서 왕을 모시며 조용히 담론(談論)하고 창화(唱和)하니, 당시 사람들이 금문우객(金門羽客)이라고 하였다.
금문원[金門遠] 금마문이 멀어짐. 과거시험에 낙방했음을 뜻한다. 삼보황도(三輔黃圖)에 “한무제(漢武帝)가 대완마(大宛馬)를 얻어 그 모습을 동상(銅像)으로 제작하고 서문(署門)에 세워 두었다. 그러므로 금마문(金馬門)이라고 이름하였고, 줄여서 금문(金門)이라고 하였다.[漢武帝得大宛馬 以銅鑄像 立於署門 故名金馬門 簡稱金門]”고 되어 있다. 한(漢)나라 때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전(玉堂殿)은 문학(文學)하는 선비들이 출사(出仕)하는 관서(官署)였다.
금문처[錦文萋] 비방하는 말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항백(巷伯)에 “조금 문채가 있는 것으로, 이 자개무늬 비단을 이루었도다.[萋兮斐兮 成是貝錦]”라고 하였다.
금문추부[金門趨鳧] 대궐에 가서 벼슬함을 뜻한다. 금문은 한나라 미앙궁(未央宮)의 대문인 금마문(金馬門)이다. 오리걸음이란 신하가 임금 앞에 몸을 굽히고 조심히 걸어 나가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금문통신[金門通神] 금문은 황금(黃金)으로 장식한 문을 가리킨 것으로, 부귀한 집안을 말하고, 신명과 통한다는 것은 금전(金錢)의 마력(魔力)이 매우 위대함을 말한 것이다. 당(唐) 나라 때 재상(宰相) 장연상(張延賞)이 일찍이 한 대옥(大獄)을 속히 판결하기 위해 미리 옥리(獄吏)를 엄히 경계시켜 놓고 다음날 등청(登廳)하여 보니, 책상 위에 조그마한 첩자(帖子)가 놓여 있는데, 거기에 “돈 3만 관으로 이 옥사를 불문에 부쳐주기를 빈다.[錢三萬貫 乞不問此獄]”라고 쓰여 있으므로 장연상이 크게 노하여 옥사를 재촉했더니, 그 다음날에는 5만 관을 말하므로 장연상이 또 크게 노하여 옥사를 더 재촉했는데, 또 그 다음날에는 10만 관을 말하므로 이때에 이르러서는 장연상이 그 옥사를 불문에 부치고 그만두자, 자제(子弟)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장연상이 말하기를 “돈이 10만 관이면 신명과 통할 수 있어, 돌이키지 못할 일이 없는 것이라, 내가 재앙이 미칠까 두려워서 그만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錢十萬貫 可通神矣 無不可回之事 吾懼禍及 不得不止]”라고 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금문피세[金門避世] 동방삭(東方朔)은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이다. 그가 술에 취해 읊은 노래에 “세속에 침체되어 있으면서 금마문에서 세상을 피해 사노라. 궁궐 속에서도 세상을 피해 살면서 자신의 몸을 보전할 수 있거늘 깊은 산속의 초가집 아래에서 살 필요 있으랴.[陸沈於俗, 避世金馬門. 宮殿中可以避世全身, 何必深山之中蒿廬之下.]”라고 하였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東方朔>
금문황각[金門黃閣] 금문(金門)은 한(漢)나라 미앙궁(未央宮)의 대문인 금마문(金馬門)이며, 황각(黃閣)은 정승이 집무하는 청사이다. 한나라 때 승상의 청사 문을 황색으로 칠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금물[禁物] 마땅히 해서는 안 될 행동. 국가에서 수출을 금하는 물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