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미[金微] 중국 변방의 산으로 진한(秦漢) 때 전쟁이 잦았던 곳이다. 금휘(金徽)라고도 하며 지금은 아이태산(阿爾泰山)이라 한다.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이곳에 금미도독부(金微都督府)가 설치된 후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후대의 시문(詩文)에서 이 산을 변새(邊塞), 또는 변새의 전쟁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참고로 당(唐)나라 우세남(虞世南)의 종군행(從軍行)에 “봉화가 금미에서 피어오르니, 연이은 군영이 무위를 내도다.[烽火發金微, 連營出武威.]”라고 하였다. <全唐詩 卷19 從軍行>
금미산[金微山] 몽고(蒙古) 지방에 있는 산 이름이다. 중국 변방의 산으로 진한(秦漢) 때 전쟁이 잦았던 곳이다. 금휘(金徽)라고도 하며 지금은 아이태산(阿爾泰山)이라 한다. 후대의 시문(詩文)에서 이 산을 변새(邊塞), 또는 변새의 전쟁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당(唐)나라 우세남(虞世南)의 시에 “봉화는 금미에서 나오고, 연이은 군영은 무위를 내도다.[烽火發金微 連營出武威]”라고 하였다. <全唐詩 卷19>
금미산[金微山] 흉노의 근거지이다. 후한(後漢) 화제(和帝) 4년(92), 금미산에서 북선우(北單于)를 포위하여 대파하고 그 어미 연지(閼氏)를 사로잡았다. <後漢書 卷4 和帝本紀>
금미지취[金迷紙醉] 금종이에 정신이 미혹(迷惑)되고 취한다는 뜻으로, 사치스런 생활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나라 말엽의 명의(名醫)인 맹부(孟斧)는 독창(毒瘡) 치료에 뛰어나서, 자주 황궁에 들어가 소종(昭宗) 황제(皇帝)의 병을 진료했다. 차츰 황제(皇帝)를 진료하는 시간과 횟수가 많아지자, 그는 황궁내의 실내 장식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훗날 맹부는 사천(四川)지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황궁을 모방하여 자신의 거처를 장식했는데, 방안의 기물들을 모두 금종이로 포장했다. 창문을 통하여 햇빛이 비칠 때면, 방안은 온통 금빛으로 가득하여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를 방문했다 돌아가면서 그에게 “이 방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만 금종이에 정신이 미혹되고 취해 버렸다네.[此室暫憩 令人金迷紙醉]”라고 말하였다 한다. 송(宋)나라의 도곡(陶谷)이 편찬한 청이록(淸異錄)이라는 책에 나온다.
금박도연[金薄圖燕] 양(梁)나라 유견오(庾肩吾)의 시 세진(歲盡)에 “한 해가 이미 다하여, 춘심이 절로 설레네. 애오라지 백엽주 술통을 열고, 한번 오신반을 차려보노라. 금박으로 제비를 그리고, 주사로 귀환을 찍노라. 매화가지 꺾을 만하리니, 눈 속에 보게 해주려나.[歲序已云殫 春心不自安 聊開柏葉酒 試奠五辛盤 金薄圖神燕 朱泥印鬼丸 梅花應可折 倩爲雪中看]”라고 하였다. 박(薄)은 판본에 따라 ‘박(箔)’으로 된 곳도 있다. 제석(除夕: 섣달 그믐날 밤)이 되면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제비 그림을 그리고, 재액을 막기 위해 붉은 주사로 귀환(鬼丸)을 찍던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읊은 것이다.
금박소향몽[衾薄疏鄕夢] 이불이 얇아 추워서 잠을 잘 자지 못하므로, 고향꿈도 따라 꾸지 못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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