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今歲] 올해.
금세계[衿帨戒] 의례(儀禮) 사혼례(士昏禮)에 “모친이 딸의 옷고름을 매 주고 허리에 수건을 채워 주면서 ‘부지런하고 공경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집안일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고 일러 준다[母施衿結帨曰 勉之敬之 夙夜無違宮事]”라고 하였다.
금소절[金素節] 가을을 말한다. 진(晉)나라 사영운(謝靈運)의 영초삼년칠월십육일지군초발도(永初三年七月十六日之郡初發都) 시에 “노를 저으니 금소로 변했네.[理棹變金素]”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선(李善)은 주(注)를 달아 “금소(金素)는 가을이다. 가을은 금이고 색이 희기 때문에 금소라고 한다.[金素 秋也 秋爲金而色白 故曰金素也]”라고 하였다.
금속[禁贖] 법사(法司)의 금리(禁吏)가 시리(市里)에 나가 금령(禁令)을 범한 자를 검거하여 거둔 속전(贖錢)을 말한다.
금속[金粟] 금속(金粟)은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전신(前身)이었다는 금속여래(金粟如來)의 준말로 곧 불(佛)을 가리킨다.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상(像)을 금속여래(金粟如來)라 한다는 말이 선화화보(宣和畫譜)에 보인다.
금속[金粟] 불명(佛名)임. 당시기사(唐詩記事)에 “금속영여래(金粟影如來)가 있는데, 왕마힐(王摩詰)이 붓을 잡고 그리니 크게 방광(放光)을 하였다.”고 하였다.
금속[金粟] 속(粟)의 빛깔이 누르스름하여 금의 빛깔과 같음을 이름인데 정명(淨名)을 혹 금속여래(金粟如來)라 한다. <維摩經 會疏 3>
금속[金粟] 산이름이다. 당 현종(唐玄宗)을 금속산(金粟山)에 장사지내고 태릉(泰陵)이라 하였다. 현종이 일찍이 금속산에 이르러 용이 서리고 봉황이 나는 듯한 산세를 보고는[覩崗巒有龍盤鳳翔之勢] 자기의 장지(葬地)로 택했다고 한다. <大唐新語 厘革>
금속[金粟] 원래 중국 섬서성(陝西省) 포성현(蒲城縣)에 있는 산 이름인데, 당 현종(唐玄宗)의 태릉(泰陵)이 있기 때문에 후세에 제왕의 능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당기(唐紀)에 “현종이 교릉(橋陵)에 갔다가 금속강(金粟岡)에 용이 서리고 봉이 나는 형세가 있는 것을 보고 시종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여기에다 묻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현종이 승하하자 유명에 따라 그곳에 장례를 치렀다.”라고 하였다.
금속[金粟] 황금 색깔의 곡식 낱알과 같은 등화(燈火)의 모습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유(韓愈)의 영등화(詠燈花)에 “황색 장막 속에 금속을 배열하고, 비녀 끝에 옥충을 꿰맨 듯해라.[黃裏排金粟 釵頭綴玉蟲]”라고 하였다.
금속강[金粟岡] 왕릉을 말한다. 당 현종(唐玄宗)의 태릉(泰陵)이 섬서성(陝西省) 포성현(蒲城縣) 금속산(金粟山)에 있기 때문에 일컫는 말이다.
금속명강[金粟名岡] 명산의 묏부리란 뜻이다. 금속은 금속산(金粟山)으로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태릉(泰陵)이 이 산에 있다. 현종이 이 산에 이르러 용이 서리고 봉황이 나는 듯한 형상을 한 산봉우리를 보고 “내가 죽은 뒤 이곳에 묻히리라.” 하였다 한다. <御定淵鑑類函 卷181>
금속보환[金粟寶環] 명황잡록(明皇雜錄)에 “여우(女優) 사아만(謝阿蠻)은 능파곡(凌波曲)의 춤을 잘 추었다. 궁중과 제이(諸姨)의 집에 드나들 때 귀비가 매우 후하게 대우해 주었는데, 임금이 서촉(西蜀)에서 화청궁(華淸宮)으로 돌아온 뒤 그녀를 불러오게 했다. 그녀가 금속보환을 꺼내어 드리며 ‘이는 귀비가 주신 것입니다.’하자 임금이 받아 만지작거리며 눈물을 떨어뜨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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