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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여래[金粟如來]~금속영[金粟影]~금속주[金粟柱]~금속퇴[金粟堆]


금속산[金粟山]  금속산은 섬서성(陝西省) 포성현(蒲城縣)에 있는데, 당 현종(唐玄宗)의 유지(遺旨)에 따라 현종을 이곳에 장사 지냈던 데서, 전하여 왕릉(王陵)을 가리킨다.

금속여래[金粟如來]  금속여래는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속제자(俗弟子)인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의 불명(佛名)인데, 성당(盛唐) 시대 시인이며 명화가(名畫家)였던 왕유(王維)의 자가 또한 마힐(摩詰)이었으므로, 전하여 후세에는 흔히 왕유를 가리키기도 한다.

금속여래[金粟如來]  부처의 이름인데, 바로 유마힐(維摩詰) 대사이다. 왕간서(王簡栖)의 두타사비(頭陀寺碑)에 “금속내의(金粟來儀)”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정명대사(淨名大士)로서 옛날의 금속여래이다.”라고 하였다. <文選 卷30>

금속여래[金粟如來]  불경(佛經)에 의하면,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전신(前身)의 이름이 금속여래(金粟如來)라 하는데, 이백(李白)이, 자신은 금속여래의 후신(後身)이라 자칭하였다.

금속영[金粟影]  금속영(金粟影)은 진(晉)나라의 고개지(顧愷之)가 그린 유마힐(維摩詰)의 화상(畵像)이다. 후대에는 생생하게 묘사된 불상을 이른다.

금속정신강후전[金粟精神降後前]  불경(佛經)에 의하면,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전신(前身)의 이름이 금속여래(金粟如來)라 하는데, 이백(李白)이 자신은 금속여래의 후신(後身)이라 자칭하였다.

금속주[金粟柱]  주(柱)는 금슬(琴瑟)이나 아쟁(牙箏), 비파(琵琶) 등에 줄을 걸 수 있게 부착한 받침대를 말한다. 금속(金粟)은 계화(桂花)의 별칭이므로 받침대를 아름답게 장식했다는 말이다. 고대에는 계수나무의 꽃을 금속(金粟)이라고도 불렀는데 꽃 색깔이 노랗고 크기가 알곡처럼 아주 작아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금속퇴[金粟堆]  금속퇴는 섬서성(陝西省) 포성현(蒲城縣) 동북쪽 금속산(金粟山)에 있다. 당 현종(唐玄宗)의 태릉(泰陵)이 있는 곳이다. 현종이 일찍이 이 산에 이르러 용이 서리고 봉황이 나는 듯한 산세를 보고 자기의 장지(葬地)로 택했다고 한다. 금속(金粟)이란 이름은 산 주위에 널려 있는 부서진 돌이 마치 곡식 낱알과 같으므로 붙인 것이라고 한다. <大唐新語 厘革>

금속퇴전목이공[金粟堆前木已拱]  금속퇴(金粟堆)는 당 현종(唐玄宗)의 태능(泰陵)이 있는 금속산(金粟山)으로 지금 섬서성(陝西省) 포성(蒲城)의 동북쪽이다. 목이공(木已拱)라 한 것은 당 현종이 세상을 떠난 때가 대종 보응 원년(762)이니, 이미 5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였다. ‘공(拱)’은 양손으로 합쳐 잡을 수 있는 굵기를 말한다. 두보(杜甫)의 시 관공손대낭제자무검기행(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에 “오십년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 세월이 빨라, 끝없는 바람 먼지 왕실 어둡게 하였기에. 이원의 제자들 연기처럼 흩어지고, 여악의 남은 자태만 차가운 해에 비친다. 금속퇴 앞에 나무는 이미 한 아름이나 되고, 구당협 석성에 풀은 쓸쓸하기만하네.[五十年間似反掌 風塵澒洞昏王室 梨園弟子散如煙 女樂餘姿映寒日 金粟堆前木已拱 瞿塘石城草蕭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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