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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지강[金華之講]~금화촉발[金華燭跋]~금화팔지[金花八枝]


금화지강[金華之講]  한 성제(漢成帝) 때 금화전(金華殿)에서 상서(尙書)와 논어(論語)를 강설한 고사에서 유래하여, 보통 유생(儒生)의 일상적인 담화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漢書 卷100 敍傳>

금화지구학[金華之舊學]  금화(金華)는 한(漢)나라 때 미앙궁(未央宮) 안에 있던 금화전(金華殿)으로, 황제가 옛 경사(經史)를 강독(講讀)하는 것을 이른다. 한서(漢書) 서전 상(敍傳 上)에 의하면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정관중(鄭寬中)과 장우(張禹)가 아침저녁으로 이곳에서 상서(尙書)와 논어(論語)를 진강(進講)하였다 한다.

금화지업[金華之業]  금화지연(金華之筵)과 같은 말로, 한나라 성제(成帝)가 금화전(金華殿)에서 상서(尙書)와 논어(論語) 등의 강론을 들은 데서 유래하였다. 흔히 경연(經筵)이나 서연(書筵)을 가리킨다. <漢書 卷100 敘傳上>

금화지연[金華之筵]  한(漢)나라 성제(成帝)가 금화전(金華殿)에서 상서(尙書)와 논어(論語) 등의 강론을 들은 고사에서 온 것이다. 흔히 경연(經筵)이나 서연(書筵)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漢書 卷100上 敍傳上>

금화촉발[金華燭跋]  구당서(舊唐書) 권165 유공권열전(柳公權列傳)에 “매번 욕당으로 불러 문대하실 때마다 촛불이 연이어 바닥을 보였으나 말씀이 아직 끝나지 않으면 촛불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궁인이 촛농으로 종이를 문질러 촛불을 대신하였다.[每浴堂召對 繼燭見跋 語猶未盡 不欲取燭 宮人以蠟淚揉紙繼之]”고 하였다. 그후로 발촉지자(跋燭之咨)는 군왕이 은혜로써 대우하며 물음을 구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발촉(跋燭)이란 거의 다 타가는 촛불을 가리킨다.

금화팔지[金花八枝]  고려(高麗) 현종(顯宗) 10년(1019) 2월 기축일에 강감찬(姜邯贊)이 구주(龜州)에서 거란병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당시에 거란병이 구주를 지나가자 강감찬 등이 동교(東郊)에서 맞아 공격하였는데, 양쪽 군사가 서로 대치하며 승패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종현(金宗顯)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니, 문득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우리 군대가 승세를 타고 용기백배하여 힘껏 공격하니 거란병이 북쪽으로 도망쳤다. 우리 군대가 이를 뒤쫓으며 공격하여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렀다. 죽은 시체가 들판을 덮었고 포로로 잡은 사람과 말, 낙타, 갑주(甲冑), 병장(兵仗) 등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살아서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 거란병이 이렇게 심하게 패한 적이 없었다. 갑오일에 강감찬 등이 개선하여 포로를 바치니, 왕이 영파역(迎波驛)에서 몸소 맞이하였다. 채붕(彩棚)을 엮어 세우고 음악을 곁들여, 장수(將帥)와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금꽃 여덟 가지[金花八枝]를 몸소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고, 오른손으로 금술잔을 잡고 왼손으로 강감찬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찬탄해 마지않았다. 강감찬이 절을 하고 사례하며 과분한 대우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드디어 영파(迎波)를 흥의(興義)로 고치고 역리(驛吏)에게도 관디(冠帶)를 하사하여 주현(州縣)의 아전과 같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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