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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암개창[汲黯開倉]~급암습유[汲黯拾遺]~급암와치[汲黯臥治]


급암개창이진기민[汲黯開倉以賑饑民]  급암(汲黯)이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다. 사기(史記) 급암열전(汲黯列傳)에 “하내(河內)에 잘못하여 불이 나서 천여 가호를 연달아 태웠다. 상(上)이 급암(汲黯)을 시켜 가서 시찰하게 하였는데,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집안사람이 잘못하여 불이 나서, 나란히 있는 집들이 잇따라 탄 것은 근심할 것이 못됩니다. 신이 하남(河南)을 지나는데 만여 가호가 홍수와 가뭄의 폐해를 입어 가난한 백성들이 혹은 부자간에 서로 잡아먹었습니다. 신이 삼가 편의대로 절(節)을 가지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였으니, 청컨대 절(節)을 돌려 드리고 황제의 명령을 사칭한 죄를 받겠습니다.’라고 하니, 상(上)이 어질게 여겨 풀어주었다.[河內失火 延燒千餘家 上使黯往視之 還報曰 家人失火 屋比延燒 不足憂也 臣過河南 貧人傷水旱萬餘家 或父子相食 臣謹以便宜 持節發倉粟 以賑貧民 請歸節 伏矯制之罪 上賢而釋之]”라고 하였다. 급암(汲黯)은 전한(前漢) 경제(景帝)와 무제(武帝) 때의 문신으로 복양(濮陽) 사람이며, 자(字)가 장유(長孺)인데 직간(直諫)을 잘하였다. 절(節)은 사자(使者)가 가지고 가는 제왕(帝王)의 신표(信標)이다.

급암기회양[汲黯棄淮陽]  급암(汲黯)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직신(直臣)으로, 무제가 일찍이 문사(文士)를 불러놓고 천하에 인의(仁義)를 베풀고자 한다는 포부를 말하자, 급암이 “폐하께서는 속으로 욕심이 많은데, 겉으로만 인의를 베풀어서야 어떻게 요순의 정치를 본받는단 말입니까.[陛下內多欲而外施仁義 奈何欲效唐虞之治乎]”라고 하였다. 이에 무제가 노하여 조회(朝會)를 파하면서 “심하다, 급암의 우직함이여.[甚矣 汲黯之戇也]”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무제는 “옛날에 사직신(社稷臣)이 있었는데, 아마 급암이 비슷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훗날 무제가 급암을 회양 태수(淮陽太守)로 임명하자, 급암은 외직보다 내직에 있으면서 임금의 부족함을 간언하겠다고 부임하기를 주저하였다. 이에 무제는 “그대의 중망(重望)을 얻어 누워서 다스리게 되길 바란다. 내 곧 그대를 다시 부를 것이다.”라고 하며 보냈으나 급암은 10년 동안 회양 태수로 있다가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史記 卷120 汲黯列傳> <史略 卷2 西漢>

급암발창속[汲黯發倉粟]  한 무제(漢武帝)가 급암(汲黯)에게 하내(河內)의 화재를 보고 오게 하였는데, 급암이 하내에 갔다가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보고는 편의대로 부절(符節)을 가지고 하내의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한 뒤 돌아와 무제에게 죄를 청했다. <漢書 卷50 汲黯傳>

급암사회양[汲黯辭淮陽]  무제가 급암을 회양 태수(淮陽太守)로 제수하자 급암은 그 인수를 받지 않고 울면서 아뢰기를 “신이 지금 병이 들어 군사(郡事)를 맡아 다스릴 힘이 없습니다. 신은 그저 중랑(中郞)으로서 금달(禁闥)을 드나들며 폐하의 잘못이 있으면 그를 도와드리는 것이 소원이옵니다.”하였으나, 무제는 그대가 회양을 맡아야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다고 하고 기어이 보냈는데, 급암은 그로부터 10년을 회양에 있다가 거기서 세상을 마쳤다. <漢書 卷五十>

급암습유[汲黯拾遺]  한 무제(漢武帝)가 급암(汲黯)을 회양 태수(淮陽太守)로 내보내려 하니 급암은 “신이 대궐에 출입하면서 폐하의 허물된 것을 보충하여 빠뜨린 것을 주워드리겠습니다.[補過拾遺]”라고 하였다.

급암와치[汲黯臥治]  급암(汲黯)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명신으로 직간(直諫)을 잘하였다. 일찍이 동해 태수(東海太守)로 있을 때 병이 많아 늘 합문(閤門) 안에 누워 정사를 오랫동안 돌보지 못했는데도 부임한 지 한 해 남짓 만에 고을이 매우 잘 다스려졌다. 후에 무제가 급암을 회양 태수(淮陽太守)에 임명하자 급암이 거절하고 인장을 받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자 무제가 말하기를 “그대는 회양을 하찮게 여기는가? 내 금방 그대를 다시 부를 것이다. 다만 회양의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화합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저 그대의 중망(重望)을 빌리는 것이니, 그대는 누워서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君薄淮陽邪? 吾今召君矣. 顧淮陽吏民不相得, 吾徒得君重, 臥而治之.]”라고 하였는데, 급암이 부임한 뒤 과연 회양이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그 후 급암은 10년 동안 회양 태수로 있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이로 인해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다스리는 것[無爲而治]을 ‘와치(臥治)’ 또는 ‘고와(高臥)’라고 한다. <史記 卷120 汲黯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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