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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량국구[杞糧菊糗], 기량지처[杞梁之妻]~기량화주[杞梁華舟]


기래난자자[飢來難煮字]  소식(蘇軾)의 건주여의승사운운(虔州呂倚承事云云) 시에 “굶주리면서 텅 빈 상만 마주할 뿐, 한 글자도 삶아 먹을 수는 없구려.[飢來據空案 一字不堪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기래무적 기왕무애[其來無迹 其往無崖]  올 때에는 자취가 없고 갈 때에는 끄트머리가 없음을 이른다. <莊子>

기량[祁梁]  기량은 신창(新昌)의 고호이다.

기량[杞梁]  기량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대부이다. 기량이 습거(襲莒) 싸움에서 전사한 뒤 그의 아내가 성 아래에서 남편의 시신을 앞에 두고 통곡하자 10일 만에 성이 무너졌다고 한다. <列女傳 卷4 齊杞梁妻傳>

기량[伎倆]  기술적인 재능이나 솜씨. 술수, 수단, 수완, 솜씨, 기량. 작용, 기교, 기능.

기량[器量]  사람의 재능과 도량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기량국구[杞糧菊糗]  벼슬에서 물러나 산나물을 먹으며 청빈하게 지낸다는 말이다. 당(唐)나라 시인으로 보리선생(甫里先生)이라 불린 육구몽(陸龜蒙)이 일찍이 가난하여 집의 앞뒤에 구기자와 국화를 심어놓고 봄・여름으로 줄기와 잎을 따서 나물로 해 먹으면서 기국부(杞菊賦)를 지었다. 뒤에 송나라 소식이 육구몽의 기국부를 모방하여 후기국부(後杞菊賦)를 지었는데 “나는 바야흐로 구기자를 양식으로 삼고, 국화를 마른 양식으로 삼아, 봄에는 싹을 먹고, 여름에는 잎을 먹으며, 가을에는 꽃과 열매를 먹고, 겨울에는 뿌리를 먹으련다.[吾方以杞爲糧 以菊爲糗 春食苗 夏食葉 秋食花實 冬食根]”라고 하였다. <東坡全集 卷33 後杞菊賦>

기량지처[杞梁之妻]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화주・기량의 아내가 그 남편의 죽음에 곡을 잘하자 나라의 풍속이 변하였다. 안에 든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밖에 나타나는 것이다.[華周杞梁之妻 善哭其夫 而變國俗 有諸內 必是形諸外]”라 하였다.

기량처[杞梁妻]  제 장공(齊莊公)이 거(莒)를 습격할 때 기량이 전사하자 그의 처가 길에서 영구(靈柩)를 맞아 슬피 울고 있었다. 장공이 사람을 시켜 조문하자 기량의 처가 “임금의 신하가 죄를 지었다면 기시(棄市)하고 그 처첩(妻妾)은 구속해야 할 것이고, 죄를 면했다면 선인(先人)이 살던 집이 있으니, 길에서 조문하여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下>

기량처[杞梁妻]  춘추 시대 제(齊) 나라 대부인 기량이 전사(戰死)하자 그의 아내가 슬퍼하면서 목놓아 크게 울다 강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녀의 여동생이 언니의 이러한 죽음을 애도하여 ‘기량처(杞梁妻)’라는 노래를 지었다. <古今注 音樂>

기량처[杞梁妻]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대부인 기량이 제나라 임금을 따라 거(莒)나라를 공격하다 죽었는데, 일가친척 하나 없는 기량의 처가 남편의 시체 옆에 엎드려 곡을 하자, 10일 만에 그 성이 무너졌다. 기량의 처는 남편을 장사 지낸 다음 치수(淄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 <列女傳 卷14 貞順傳 齊杞梁妻>

기량처곡[杞梁妻哭]  춘추 시대 제(齊)나라 대부 기량이 임금을 따라 거(莒)나라의 성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는데, 기량의 처가 남편의 시체 옆에서 10일 동안을 엎드려 통곡하니, 그 성이 무너졌다고 한다. <古列女傳 巻4 貞順傳>

기량화주[杞梁華舟]  기량(杞梁)과 화주(華舟). 둘 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대부(大夫)이다. 기량(杞梁)의 이름은 식(殖 또는 植)이고, 량(梁)은 자(字)이다. 화주(華舟)는 화주(華周)・화주(華州)・화환(華還)으로도 쓴다. 둘이 함께 장공(莊公)을 따라 거(莒)를 치다가 전사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 23년>・<禮記 檀弓 下>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화주・기량의 아내가 그 남편의 죽음에 곡을 잘하자 나라의 풍속이 변하였다. 안에 든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밖에 나타나는 것이다.[華周杞梁之妻 善哭其夫 而變國俗 有諸內 必是形諸外]”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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