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金炳淵]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방랑(放浪) 시인(詩人). 자는 성심(性深)이며 호는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 불린다. 본관은 안동(安東). 경기도 양주 출생.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즉흥적인 풍자시를 많이 지어서 남겼다.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였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에 항복한 죄로 집안이 멸족(滅族)을 당하였다. 노복 김성수(金聖洙)의 도움으로 여섯 살 때 형 김병하(金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廢族)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김안근(金安根)은 화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하여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로 방랑 생활을 시작하였다.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 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 전남 화순)에서 57세에 객사하였다.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전한다.
김생[金生] 신라 시대 명필가로, 예서(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모두 뛰어나 해동(海東)의 초성(草聖)으로까지 일컬어졌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8 김생열전(金生列傳)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하여 예서(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4 충주목(忠州牧) 조에 김생사(金生寺)를 소개하면서 “김생이 두타행(頭陀行)을 닦고자 하여 이 절에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김생[金生] 통일신라 시대 해동서성(海東書聖)이라고 했던 서예가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8 열전(列傳) 제8 김생(金生)에 의하면 “김생은 부모가 한미(寒微)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였다. 고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홍관(洪灌)이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폭을 내보이자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라고 하며 놀라워하였다.”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작품은 없어졌으나 그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필적으로 현재 경복궁에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다.
김섬[金蟾] 자가 덕구(德求)인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의 첩이다. 임진왜란 때 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절을 마친 뒤 그의 부친 송부흥(宋復興)에게 “외론 성 달빛 비추는데, 여러 진은 태평하구나.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네.[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라는 글을 올렸다. 마침내 해를 당하였는데, 공은 죽기 전에 그 부하에게 명령하기를 “내 허리 아래에 콩만 한 사마귀가 있으니 내가 죽으면 이것을 가지고 증험을 삼아서 내 시신을 거두어라.”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평의지(平義智)와 현소(玄蘇) 등이 이르러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탄식하며 애석해하고는 공을 해친 자를 죽였다. 공의 첩 김섬(金蟾)은 함흥(咸興)의 기생이었데, 공을 따라 동래부에 왔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공이 조복(朝服)을 가지고 오라고 명하였는데 김섬은 공이 의를 지켜 죽으려는 것인 줄 알고 담을 넘어서 공이 있는 곳에 가니, 왜적이 이미 모여들어서 공을 해친 뒤였다. 김섬 또한 사로잡혔는데 3일 동안이나 쉴 새 없이 욕을 해대다가 마침내 왜적에게 살해당하였다. 왜적이 기특하게 여겨 관을 갖추어서 공과 함께 장사하였다. 김섬(金蟾)은 송상현(宋象賢)이 제향된 동래(東萊) 충렬사(忠烈祠)의 문외(門外)에 배향되었다.
김성탄[金聖嘆] 명 나라 말기 장주(長洲) 사람으로 본래 성명은 장채(張采)였는데, 뒤에 김위(金喟)로 고쳤다. 성탄은 그의 자(字)이다. 명 나라가 망하니 벼슬할 것을 단념하였다. 위인이 광오(狂傲)하며 기기(奇氣)가 있고 박람강기(博覽强記)하였다. 수호전(水滸傳)・서상기(西廂記)에 대한 비평(批評)은 유명하다. 유남수필(柳南隨筆)에 의하면, 청 나라 순치(順治) 말기에 문묘(文廟)에 곡(哭)한 죄로 주참되었다 한다.
김수문[金秀文]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장(成章)이다.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여진족들이 함경도 종성에 침입하여 사람들을 납치해 가자 전투에 참가하여 끌려갔던 사람들을 되찾아 왔으며, 1555년(명종10) 을묘왜변 때 제주 목사로서 왜구를 대파하였으며 후에 여러 번 호인(胡人)의 침략을 격퇴하여 큰 공을 세웠다.
김시습[金時習] 조선 세종(世宗)에서 성종(成宗) 때의 학자이자 문인.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峯),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 등을 썼다. 법호는 설잠(雪岑)이고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주기론적(主氣論的)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 흡수하여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한양의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세 살 때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비도 안 오는데 천둥소리 울리고, 노란 구름 여기저기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고 시를 읊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고, 다섯 살 때 궁으로 들어가 세종을 알현하였다. 열다섯 살 때 모친을 잃고 외가에 의탁하였으나 3년 뒤 외숙모마저 세상을 뜨자 다시 상경했을 때는 부친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연속되는 가정의 불우 속에서도 결혼을 하고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읽던 책을 불태워버리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이후 십 년 가까이 전국을 유랑하였다. 여러 차례 세조의 부름을 받고도 응하지 않고 금오산실(金鰲山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썼다. 상경하여 잠시 성동에 살기도 하였으나 다시 서울을 떠나 방랑하다가 충남 부여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떴다. 일생 절개를 지키며 유불(儒佛)을 포섭한 사상과 뛰어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영월에 있는 육신사(六臣祠)에 배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