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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부귀[金張富貴]~김장허사[金張許史]~김피부[金皮膚]


김응하[金應河]  김응하의 자는 경의(景義),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39세 때인 광해군 11년(1619) 선천군수 겸조방장(宣川郡守兼助防將)으로 있던 중, 명 나라의 원병 요청에 의해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거느리는 군사와 합류하여 3월 4일 적과 접전하던 가운데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우영장(右營將) 이일원(李一元)등은 다 항복하고 명 나라 군사들은 완전히 패몰하였다. 이때 김응하는 버드나무를 등지고 단신으로 수백 명의 적을 죽인 뒤에 창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듬해에 명 신종(明神宗)에 의해 요동백(遼東伯)에 추봉되었으며 백금 1만 냥을 보내와 그의 가족에게 나눠주게 하였다. <海東名臣錄>

김인산[金仁山]  송말원초(宋末元初) 때 학자인 김이상(金履祥)이다. 자는 길보(吉父), 호는 차농(次農)・동양숙자(桐陽叔子),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송나라가 망하자 원나라에 벼슬하지 않고 오로지 저술에만 뜻을 두었으며, 만년에 인산(仁山) 아래 이택서원(麗澤書院)에서 학문을 강론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인산선생(仁山先生)’이라 일컬었다. 저서로 논어맹자집주고증(論語孟子集注考證), 자치통감전편(資治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상서표주(尙書表注), 인산문집(仁山文集) 등이 있다. <宋元學案 卷82>

김일제[金日磾]  자는 옹숙(翁叔), 시호는 경(敬)이다. 서한(西漢) 때 무위군(武威郡) 휴도현(休屠縣)(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민근현民勤縣) 사람이다. 본명이 일제(日磾)였고, 한무제가 ‘김(金)’을 성으로 하사한 뒤 김일제(金日磾)가 되었다. 원래는 흉노국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는데, 한무제 원수(元狩) 연간에 곽거병(霍去病)이 휴도국을 습격하여 휴도왕을 죽였을 때, 당시 열네 살이었던 김일제는 곤야왕(昆邪王)을 따라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항복하지 않고 살해되었다는 이유로 한(漢)나라에 끌려가 관노(官奴)가 되어 황문(黃門)에서 말을 길렀으나 마감(馬監)을 시작으로 승진을 거듭하면서, 근신하고 충직한 성격을 인정받고 무제(武帝)에게 발탁되어 시종(侍從)이 되었다가 이어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제수되었는데, 모반한 망하라(莽何羅)를 포박하여 주참한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한무제가 세상을 뜬 뒤에는 곽광(霍光), 상관걸(上官桀), 상홍양(桑弘羊)과 함께 무제(武帝)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정사를 보필하였으며, 관직이 태자태부(太子太傅)까지 올랐다. 자손들이 7대에 걸쳐 선초(蟬貂)를 머리에 꽂는 고위 관직을 역임하여 한(漢)나라의 대표적인 명문가가 되었다. <漢書 金日磾傳> 일설에는 우리나라의 김씨가 그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한 무제(漢武帝)가 김일제의 아들을 농아(弄兒)로 삼아 데리고 놀았는데, 그 아들이 근신하지 않고 대궐에서 궁녀와 희롱하는 것을 김일제가 목격하고는 그 음란함을 미워하여 죽이니, 무제가 크게 노하였다. 이에 김일제가 사죄하면서 그를 죽여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니, 무제가 매우 슬퍼하면서도 마음속으로 김일제를 경외했다는 기록이 한서(漢書) 권68 김일제전(金日磾傳)에 나온다.

김장[金張]  한(漢) 나라 때 권신 김일제(金日磾)와 장안세(張安世)의 두 집안을 가리키는데, 특히 이 두 집안은 7대 동안이나 자손들이 대대로 시중(侍中), 중상시(中常侍)가 되어 왕(王)을 가까이 모시면서 부귀영화를 누렸으므로, 후에는 높은 고관(高官)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김장부귀[金張富貴]  김장(金張)은 한 나라 때 공신 세족(功臣世族)인 김일제(金日磾)와 장탕(張湯)을 가리킨다. 김일제 집안은 무제(武帝)때부터 평제(平帝)때까지 7대가 내시(內侍)벼슬을 지냈고, 장탕의 자손은 선제(宣帝)・원제(元帝)이후 시중(侍中)과 중상시(中常侍)를 지낸 사람이 10여 인이나 되었다.

김장지세주[金張之勢冑]  한(漢) 나라 김일제(金日磾)의 자손 장안세(張安世)의 자손이 대대로 좋은 벼슬을 하였다.

김장허사[金張許史]  김장(金張)은 한(漢)나라 때 칠세(七世)에 걸쳐 고관대작(高官大爵)에 올라 부귀영화를 극도로 누렸던 김일제(金日磾)와 장안세(張安世)를 가리킨다. 허사(許史)는 한 선제(漢宣帝)의 후비(后妃)인 허 황후(許皇后)의 집안과 한 선제의 조모(祖母)인 사 양제(史良娣)의 집안을 말한다. 모두 국가의 정치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화벌갑족이나 외척을 뜻하는 말이다. 장안세(張安世)는 장탕(張湯)의 아들이다.

김장허사가[金張許史家]  한(漢)나라 때의 권력가 가문. 김(金)씨는 김일제(金日磾), 장(張)씨는 장탕(張湯), 허(許)씨는 허광한(許廣漢: 허 황후의 부친), 사(史)씨는 사양제(史良娣: 선조宣祖의 조모)이다.

김제세[金濟世]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걸인 행세를 하던 사람으로, 1612년(광해군4) 김백함(金百緘)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체포되어, 많은 사람을 반란 가담자로 무고하였다.

김주[金澍]  농암(籠巖) 김주(金澍)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려 말엽에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명(明) 나라에 하절사(賀節使)로 갔다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태조(李太祖)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인에게 조복(朝服)과 신을 주어 보내면서 “이것을 신표로 삼아 내 아내가 돌아가거든 합장하고, 또 내가 명(明) 나라로 들어가는 날을 제삿날로 삼으라.” 하였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명 나라로 들어가 명 태조에게, 군사를 일으켜 조선 이 태조를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명 태조는 그에게 상서(尙書)의 녹(祿)을 종신토록 주었는데, 그는 형초(荊楚) 지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김천일[金千鎰]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 본관은 언양(彦陽)이며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에 고경명(高敬命)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다. 경상도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도 병사 황진(黃進) 등과 함께 진주성(晉州城)을 지켰는데, 10만에 달하는 왜군의 공세로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김피부[金皮膚]  김피부(金皮膚)・민부지(閔不知)・허초혼(許初昏)・조삼경(趙三更)는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지 못하는 관리를 기롱하는 말. 중종 12년을 전후한 시기에 노비의 소송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에 김근사(金謹思)와 민원(閔㥳)이, 사의(司議)에는 허인(許璘)과 조문린(趙文璘)이 재직하고 있었는데, 당시 송사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우매함을 기롱하여 김피부・민부지・허초혼・조삼경이라고 하였다. ‘피부’는 겉만 다룬다는 뜻이고, ‘부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며, ‘초혼’은 어둑하다는 뜻이고, ‘삼경’이란 매사에 캄캄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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