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懶翁]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왕사(王師)인 혜근(惠勤)의 법호이다. 또 다른 호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속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이다. 중국 원나라에서 인도의 승려 지공화상(指空和尙)에게서 심법(心法)의 정맥(正脈)을 받아 지공・무학(無學)과 함께 삼대 화상(三大和尙)으로 불렸다. 조선 건국에 기여한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다. 양주 회암사(檜巖寺) 주지로 있던 1376년(우왕2)에 왕명으로 밀양(密陽) 영원사(瑩原寺)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그의 석종(石鐘)의 명문(銘文)과 비문을 지었다.
나옹[懶翁] 고려 후기 선종의 고승 혜근(惠勤)의 호이다. 혜근의 성은 아씨(牙氏)이고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회암사 주지로 회암사(檜巖寺)를 중건하고 교화 활동을 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회암사 문 앞을 꽉 메우자 사헌부에서는 관리를 보내 부녀자들이 오는 것을 금하고 도당(都堂)에서도 절 문을 닫게 하였다. 그래도 몰려드는 사람들을 금할 수 없자 결국 나옹을 경상도 밀성군(密城郡)에 추방하였다.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고, 이색(李穡)이 글을 지어 세운 비와 부도가 신륵사에 있다. 보우(普愚)와 함께 조선 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1권과 가송(歌頌) 1권이 전한다. 영정은 현재 지공(指空), 무학(無學)의 영정과 함께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에 보존되어 있으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7호로 지정되었다.
나옹대[懶翁臺] 나옹 화상이 머물렀던 여주 신륵사(神勒寺) 옆에 있는 동대(東臺)를 가리킨다.
나옹삼가[懶翁三歌] 삼가(三歌)는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의 맨 처음에 나오는 완주가(翫珠歌)・백납가(百衲歌)・고루가(枯髏歌) 등 한문으로 표기된 불교 가요 3수를 말한다. 완주가는 영롱한 구슬을 인간 속에 본래 갖추어진 불성(佛性)에 비유하여 무명(無明)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 노래이고, 백납가는 일백 번 꿰맨 누더기 장삼을 입고 수행하는 구도자의 무소유 정신을 찬미한 노래이며, 고루가는 마른 뼈다귀로 변한 해골을 통하여 인생의 무상함을 밝히고 참된 도를 깨달을 것을 권고한 노래이다.
나옹탑[懶翁塔] 나옹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의 고승이다. 우왕(禑王) 2년(1376)에 왕명으로 밀양 영원사(瑩原寺)로 가던 도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여 거기에다 부도(浮屠)를 세웠다.
나옹화상[懶翁和尙] 고려 때의 고승으로, 여주(驪州)의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나와엽전방성종[騾臥喦前訪聖蹤] 법주사(法住寺) 전설에 “신라 중 의신(義信)이 노새로 경(經)을 싣고 와 처음 이 절을 이룩했다.”고 한다.
나왕[羅王] 중국의 학자인 나종언(羅從彦)과 왕수인(王守仁)을 가리킨다. 송나라의 학자인 나종언은 정자(程子)의 뒤를 이은 양시(楊時)에게 배웠으며, 이를 다시 이통(李侗)에게 전하고, 이통이 주자(朱子)에게 전하였다. 명(明)나라의 유학자인 왕수인은 절강(浙江) 사람으로, 호가 양명(陽明)이며,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을 주장하여 주자학파(朱子學派)와 서로 다투었는데, 세상에서는 그의 학파를 요강학파(姚江學派)라 불렀다.
나외[蘿外] 두보(杜甫)의 시 부성현향적사관각(涪城縣香積寺官閣)에 “나무 덩굴 저 너머에 응당 암자 있으련만, 산꼭대기 오르려면 날이 깜깜해지겠군.[諸天合在藤蘿外 昏黑應須到上頭]”이라는 구절에서 온 것으로, 이후 등라(藤蘿)나 등라외(藤蘿外), 나외(蘿外) 등은 높은 산에 위치한 절이나 암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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