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윤[羅倫] 자는 이정(彝鼎), 호는 일봉(一峯)으로 명(明) 나라 영풍(永豐) 사람이다. 성화(成化)의 진사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는데,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금화산(金華山)에 은거하였다.
나융[懶融] 선사(禪師)의 이름이다.
나은[羅隱] 당말(唐末) 오대(五代)의 시인으로 본명은 횡(橫)이다. 모두 십여 차 과거에 실패하자, 은(隱)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시명이 천하에 진동하였으며 특히 영사(詠史)에 뛰어났으나, 비판과 풍자의 색채가 짙어 종신토록 급제하지 못하였다. 난리를 피해 향리로 내려갔다가 절도사(節度使) 전류(錢鏐)에게 발탁되어 종사관으로 몸을 의탁하였다. <舊五代史 卷24 羅隱列傳>
나은[羅隱] 만당(晩唐)의 문학가로 자는 소간(昭諫)이고 강동생(江東生)이라는 자호를 썼다. 여향(餘杭: 지금의 저장성浙江省 여항餘杭) 사람인데 신등(新登: 지금의 저장성浙江省 강동려江桐廬)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본명이 횡(橫)이었지만 스무 살 때 처음 치른 진사시험에서 낙방한 뒤 은(隱)으로 이름을 바꿨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대량(大樑), 회(淮), 윤(潤) 등을 돌아다니며 일을 찾았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참고로 “재주를 믿고 다른 사람을 깔보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미워했다.[恃才忽睨, 衆頗憎忌.]”는 평가가 있었다. 당 희종(僖宗) 3년(887) 강동(江東)으로 돌아와 궁핍한 세월을 보내다가 55세가 되어서야 나중에 오월국(吳越國)을 세운 전류(錢鏐)의 막료(幕僚)가 되어 전당령(錢塘令), 진해군장서기(鎭海軍掌書記), 절도판관(節度判官), 염철발운부사(鹽鐵發運副使), 저작좌랑(著作佐郎)을 거쳐 사훈랑(司勳郎)이 되었다. 오만한 성격을 끝내 고치지 못했으나 전류는 그런 그를 밉게 보지 않았다. 후량(後梁)을 세운 주전충(朱全忠)이 간의대부 자리를 주며 등용하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소위(羅紹威)가 후량(後梁)에 귀부한 뒤, 나은을 적극 추천하여 그를 후량의 급사중(給事中)으로 삼았고, 이때 주군인 전류도 이미 주온(朱温)에게 신하를 칭하고 있었기에 나은도 할 수 없이 받았다고 한다. 급사중(給事中)이 된 지 오래지 않아 전당(钱塘)에서 숨을 거뒀고, 후인들이 그를 나급사중(羅給事中)라 불렀다. 저작으로 강동갑을집(江東甲乙集), 회남우언(淮南寓言)과 참서(讖書), 후집(後集) 등을 남겼다. 나은의 시는 영사(詠史), 즉 역사를 읊은 것이 많았는데, 당재자전(唐才子傳)에는 나은의 글을 평해 “시문(詩文)은 무릇 풍자하고 비꼬는 것을 주로 삼아 오래된 사당의 목상이라 해도 피해갈 수가 없었다.[詩文凡以譏刺為主, 雖荒祠木偶, 莫能免者.]”라고 하였으며, 그 시풍(詩風)은 만당(晚唐)의 한 파에 속했고, 민간에 나도는 구어(口語)를 다듬는 데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은한[羅隱恨] 나은은 당말(唐末) 시인으로 여러 번 과거에 응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나의[蘿衣] 벽라의(薜蘿衣)의 준말로, 보통 산에 사는 은자(隱者)의 복장을 가리킨다. 초사(楚辭) 구가(九歌) 산귀(山鬼)에 “벽려로 옷을 해 입고 여라의 띠를 둘렀도다.[被薜荔兮帶女蘿]”라고 표현한 말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