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묵[螺子墨] 고대에는 먹이 없다가 위진(魏晉) 시대에 와서 처음으로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으로 먹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때 먹의 모양이 둥근 모양이었다 한다. 이 둥근 먹을 이어받은 것을 나자묵(螺子墨)이라 한다.
나작[羅雀] 참새 그물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문전이 썰렁함을 뜻한다. 한나라의 적공(翟公)이 관직에서 축출되었다가 다시 정위(廷尉)가 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史記 卷120 汲鄭列傳>
나작굴서[羅雀掘鼠]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다. 양식이 다 떨어져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고 쥐구멍을 파서 쥐를 잡아먹는다는 뜻으로 궁지에 몰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말기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순(張巡)이 3만의 군사로 수양성을 지키게 되었다. 그는 안녹산의 부장인 윤자기(尹子琦)가 이끄는 10만 대군과 죽음을 무릅쓰고 맞서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다급해진 장순은 임회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위급함을 알렸으나, 평소 장순을 시기하던 그는 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포위된 채 몇 달이 지나자 성 안의 식량은 바닥났고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그물을 쳐 참새를 잡고 굴을 파 쥐를 잡아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안타까운 마음에 장순은 자신의 애첩을 죽여 죽을 끓여 먹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악화돼 끝내 반란군에게 성을 내주고 말았다. <당서(唐書) 장순전(張巡傳)>
나작문[羅雀門] 참새 잡는 그물을 펼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문정(門庭)이 적막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급정열전 논(汲鄭列傳論)에 나오는 적공(翟公)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적문(翟門)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 권120 급정열전(汲鄭列傳)에 “한나라 적공(翟公)이 정위(廷尉)로 있을 때에는 빈객이 서로 다투어 찾아오는 바람에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가, 파직된 뒤에는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아 문 앞에 참새 잡는 그물을 칠 정도가 되었는데[可設雀羅], 다시 복관(復官)되매 빈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문에다 큰 글씨로 써서 내걸기를 ‘한번 죽고 한번 살매 우정을 알 수 있고,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유하매 친구의 태도를 알 수 있으며, 한번 귀하고 한번 천해지매 속마음이 다 보이도다.[一死一生乃知交情 一貧一富乃知交態 一貴一賤交情乃見]’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그후 작라문(雀羅門)은 영락한 집이거나 권세를 잃은 집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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