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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족지수[臝族之首]~나종언[羅從彦]~나줄지상[蘭茁之祥]


나조[羅趙]  진(晉)나라의 나휘(羅暉)와 조습(趙襲)을 병칭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당시 서법가로 이름이 높았다.

나조[羅趙]  서법(書法)의 명가(名家)로 일컬어졌던 후한의 나휘(羅暉)와 조습(趙襲)의 병칭인데, 장지(張芝)가 이들을 평하면서 “내가 위로 최(崔)・두(杜)와 견주기에는 부족하다마는, 아래로 나(羅)・조(趙)와 비교한다면 여유가 있다.”라고 한 고사가 전한다. <法書要錄 卷1 引 採古來能書人名>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도 “종요(鍾繇)와 장지(張芝)에 뒤지지 않는다고 그대 자부하는데, 나 역시 나휘나 조습에 비한다면 우월하다오[不減鍾張君自足 下方羅趙我亦優]”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6 石蒼舒醉墨堂> ❏

나족지수[臝族之首]  나(臝)는 나(裸)와 같은 자로 나족은 나충(裸蟲)의 종류를 이른다. 나충은 몸을 보호하는 깃털이나 털, 비늘이나 껍질이 없는 동물로 나족의 으뜸은 곧 사람을 가리킨다.

나졸[懶拙]  게으르고 멍청하다. 게으르고 졸렬하여 세상의 공명(功名)에 뜻이 없는 것을 말한다.

나종언[羅從彦]  자는 중소(仲素), 호는 예장(豫章), 시호는 문질(文質)이며, 남검(南劍) 사람이다. 정이(程頤)와 양시(楊時)를 사사하였다. 양시・이동(李侗)과 함께 남검삼선생(南劍三先生)으로 불리었다. 1130년 특과(特科)에 급제하여 박라현 주부(博羅縣主簿)가 되었으며, 임기를 마친 후 나부산(羅浮山)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는 양시의 학문을 이동에게 전하였고, 이동은 다시 주희에게 전하여 정이로부터 주희에 이르는 학맥의 중요한 위치에 있다. 저술로 춘추지귀(春秋指歸), 중용설(中庸說), 논어해(論語解), 맹자해(孟子解) 등이 있다.

나종언[羅從彦]  북송(北宋) 말기 남송(南宋) 초기의 유학자이다. 복건성(福建省) 남검(南劍) 출신으로, 자는 중소(仲素), 시호는 문질(文質), 예장선생(豫章先生)이라고 불렸다. 동향의 선배 양시(楊時)의 가르침을 받고, 두 정자(程子)의 학문을 동향의 후배 이연평(李延平)에게 전하여 주자에 이르러서 남검의 세 선생이[南劍三先生]라고 불렸다. 1130년 광동(廣東) 박나(博羅)의 주부(主簿)로 임명되었으나 관직에서 퇴직한 뒤에는 나부산(羅浮山)에 들어가 온종일 단정히 앉아 학문에 정진하여 마침내 구산문하(龜山門下)의 제1인자가 되었다. 저서에 예장문집(豫章文集), 준요록(遵堯錄) 등이 있다.

나줄지상[蘭茁之祥]  한유(韓愈)의 전중소감마군묘명(殿中少監馬君墓銘)에 “어린 아들은 아름답고 예쁘며 조용하고 빼어나서 옥가락지나 옥귀고리와 같고 난초의 싹이 돋아난 것과 같으니, 그 집안의 아들에 걸맞았다.[幼子娟好靜秀 瑤環瑜珥 蘭茁其芽 稱其家兒也]”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4>

나중소[羅仲素]  송(宋)나라 남검(南劍) 출신으로 이름은 종언(從彦), 자는 중소(仲素), 시호는 문질(文質), 예장선생(豫章先生)이라고 부른다. 양시(楊時)의 제자이다. 건염(建炎) 중기에 박라주부(博羅主簿)가 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나부산(羅浮山)에 들어가 조용히 공부하자 그를 따라 배우는 선비들이 많았다. 저서에 춘추모시어해(春秋毛詩語解), 예장집(豫章集), 중용설(中庸說), 춘추지휘(春秋指揮)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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