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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함[羅含]~나향[懦響]~나호지재대릉[蘿蒿之在大陵]~나홍곡[囉嗊曲]


나함[羅含]  동진(東晉) 때의 사상가이자 철학가 겸 문학가로 자는 군장(君章)이며, 뇌양(耒陽) 사람이다. 중국 산수산문(山水散文) 창작의 선구자로 일컫는다. 상수(湘水) 지역의 산수를 다룬 상중산수기(湘中山水記)를 저술하였다. 일찍이 꿈속에서 문채가 아름다운 새가 입으로 날아들었는데, 그로부터 문장이 날로 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함국향[羅含菊香]  진(晉)나라 나함(羅含)이 덕망이 높아서 관사(官舍)에 있을 적에는 흰 참새가 당우(堂宇)에 떼로 모여들었고, 치사(致仕)하고 집에 돌아오자 섬돌과 뜰에 홀연히 난초와 국화가 무더기로 피었다고 한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羅含>

나함택사[羅含宅舍]  진(晉) 나라 나함이 덕망이 높아 관사(官舍)에 있을 적에는 흰 참새가 모여들었고 치사(致仕)하고 나서 집에 거할 적에는 난초와 국화가 홀연히 뜰에 무더기로 피었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92 文苑傳 羅含傳>

나향[懦響]  여린 소리. 낮은 울림.

나향독우경출주[懶向督郵傾秫酒]  독우를 향하여 차조술 기울이기 싫음. 점필재집(佔畢齋集) 화선원각기(和善源却寄)에 나오는 구절이다.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을 적에 팽택현의 공전(公田)에 모두 차조[秫]만 심게 하면서 말하기를 “나에게 항상 술에 취하게만 해주면 만족하겠다.”하였고, 또 그 후에는 군(郡)에서 독우(督郵; 지방 감찰관)가 나왔을 때, 아전이 관복을 정제하고 독우를 알현해야 한다고 말하자, 도잠이 탄식하기를 “나는 오두미(五斗米) 녹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鄕里)의 소인(小人)을 섬길 수 없다.”하고는, 즉시 인끈을 풀어 던지고 돌아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九十四>

나호지재대릉[蘿蒿之在大陵]  증공(曾鞏)의 복주상집정서(福州上執政書)에 “천하의 인재를 배양하여 그들이 성취하도록 도와주면 마치 재쑥이 큰 언덕에 뿌리를 내려 잘 자라지 않은 것이 없는 것과 같고, 성취된 뒤에 예우를 갖춰 맞아들이는 자세가 정성에서 우러나오면 마치 사슴이 애절한 울음으로 서로를 불러 그 소리가 피상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 경우와 같습니다.[長育天下之材 使之成就 則如蘿蒿之在大陵 無有不遂 其賓而接之 出於懇誠 則如鹿鳴之相呼召 其聲音非自外至也]”라고 한 데서 보인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의 “무성한 재쑥이 많이도 자라 저기 저 큰 언덕에 깔려 있구나. 내 이미 여러 군자 만나고 보니 이들이 거둥 좋아 즐겁고 말고.[菁菁者莪 在彼中阿 旣見君子 樂且有儀]”를 인용한 것이다. 훌륭한 위정자(爲政者)가 인재를 배양하는 환경을 잘 조성하여 성취해내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나호(蘿蒿)’는 ‘아(莪)’를 설명한 것으로 십자화과의 두해살이 풀인 재쑥이다.

나홍[囉嗊]  가곡 이름이다. 천록지여(天祿識餘)에 “나홍은 옛날 진 후주(陳後主)가 세운 누대 이름이다. 당 나라 원진(元稹)이 절동(浙東)을 염찰(廉察)할 때 기생 유탐춘(劉探春)이 이 가곡을 잘 불렀다.”고 하였다. 운계우의(雲溪友議)에는 “원진이 유채춘(劉采春)에게 선사능창망부가(選詞能唱望夫歌)를 주었는데 그것이 곧 나홍곡(囉嗊曲)이다.”라고 하였다.

나홍곡[囉嗊曲]  나홍곡(囉嗊曲)은 가곡의 한 이름이다. 당나라 범터(范攄)의 운계우의(雲溪友議)에 “금릉에 나홍루라는 누각이 있는데, 바로 진 후주가 세운 누대이다. 나홍곡은 유채춘(劉采春)이 부른 곡이다. 모두 당시 제자들이 지은 오언, 육언, 칠언의 절구이다. 일명 망부가(望夫歌)라고도 한다.[金陵有囉嗊樓 乃陳後主所建 囉嗊曲劉采春所唱 皆當代才子所作五六七言絕句 一名望夫歌]” 하였다. 또 천록지여(天祿識餘)에 “나홍은 옛날 진 후주(陳後主)가 세운 누대 이름이다. 당나라 원진(元稹)이 절동(浙東)을 염찰(廉察)할 때 기생 유탐춘(劉探春)이 이 가곡을 잘 불렀다.”라고 하였다. 주로 단조(單調) 20자로, 4구에 양평운(兩平韻)을 쓰거나 삼평운(三平韻)을 쓰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홍선[羅洪先]  명(明)나라 때 활약한 은둔거사로 자는 달부(達夫), 호는 강서길수인(江西吉水人)이다. 집안 족보에는 언명공(彦明公)으로도 실려 있다. 가정(嘉靖) 8년(1529) 기축과(己丑科) 회시(會試)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후 사람들이 그를 나장원(羅狀元)으로 불렀다. 사람됨이 공정하고 인격이 고상했으며 공무 처리에 충직하고 성실하였다. 황제가 장수를 바라며 도교에 심취하는 모습과 부패한 정치 현실에 염증을 느껴 가정(嘉靖) 18년(1539) 벼슬을 그만두고 학자의 삶을 시작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산중에 은거하면서 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을 연구하면서 삼 년 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문을 나서지 않았다. 지리학과 지도학에 성취를 보여 이후의 중국 지도학에 크게 공헌하였다. 출가 후에는 염암(念庵)이라는 법호를 썼다. 남악(南岳) 고대사(高台寺) 주지 초석(楚石) 화상과 교유하였고, 그가 지인과 함께 심은 황산송(黃山松)은 지금도 벽라봉(碧蘿峰) 오른쪽 산비탈에 건재하다. 광여도(廣輿圖) 2권를 편찬하고 성세시(醒世詩)를 지었다. 명사(明史)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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