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樂浪] 한 무제(漢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설치한 4군 가운데 하나이다.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임둔(臨屯)으로 군을 합치면서 속현(屬縣)이 모두 25개로 늘어나 북쪽으로는 압록강, 남쪽으로는 한강에까지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강원도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뒤에 2부(府)로 개조하면서 영동의 7개 현을 나누어 동부도독부(東府都督府)에 소속시켰다. 후한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낙랑 남쪽을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을 만들었다. 진 민제(晉愍帝) 건흥(建興) 원년(313)에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에 의해 병합되었다. <韓國地名沿革考 樂浪>
낙랑[樂浪] 한나라의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세운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로 4군 중에서 최후까지 남은 유일한 군이다.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4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북부의 중국 변군(邊郡)으로 존속하였다. 일부 학자들 및 재야사학자들은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요동 또는 요서 지역이었다고 주장한다.
낙랑경사왜병퇴[樂浪更似倭兵退] 신라 혁거세(赫居世) 30년(기원전 28) 4월에 낙랑(樂浪)이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침입하였다가 신라 사람들이 밤에 문을 닫지 않고 노적가리가 들에 가득한 것을 보고는 “이곳 사람들은 서로 도적질을 아니 하니 과연 도가 있는 나라이다. 우리가 가만히 군사를 끌고 와서 습격하는 것은 도적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고서 바로 군사를 끌고 돌아갔다고 한다. 왜병이 물러간 일은 혁거세 8년(기원전 50)에 왜인(倭人)이 군사를 끌고 변방을 침입하러 왔다가 혁거세에게 신덕(神德)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돌아간 것을 이른다.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始祖 赫居世居西干>
낙랑왕[樂浪王] ‘낙랑’은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이다. ‘왕’이라는 호칭에 대해 안정복(安鼎福)은 “낙랑은 중국의 군(郡)인데 어찌 왕을 칭했을 리 있겠는가. 삼국 사이에 끼어 그 세력이 왕과 같았으므로 우리나라 사람이 왕이라 호칭한 것뿐이다.[樂浪爲中國之郡 則豈有稱王之理 蓋厠於三國之間 其勢如王 故東人稱之爲王耳]”라고 하여 낙랑이 독립된 나라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東史綱目 第1下 壬辰>
낙랑우어[樂浪鰅漁] 우어[鰅]는 표피에 무늬가 있는 고기로 낙랑(樂浪)의 동이(東暆)에서 난다고 한다. <說文>
낙루[落漏] 기입하여야 할 것이 빠지거나 빠지게 함을 이른다.
낙류[落留] 함께 동행하다가 떨어져서 머무름을 이른다.
낙리[樂利] 전왕(前王)이 인정(人情)에 맞게 정교(政敎)를 폈기 때문에 후민(後民)들이 모두 전왕이 좋아한 것을 좋아하고, 전왕이 이롭게 여긴 것을 이롭게 여긴다는 뜻이다. 대학(大學) 전 3장에서 시경(詩經) 주송(周頌) 열문(烈文)의 “아, 전왕을 잊지 못하리로다.[於戲 前王不忘]”를 인용하면서 “군자들은 그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고 그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며, 백성은 그 낙을 즐겁게 여기고 그 이를 이롭게 여기나니, 이래서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이다.[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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