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사[樂何事] 논어(論語) 옹야(雍也)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항(陋巷)에서 살게 되면 남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또한 술이(述而)에서도 공자는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서 베더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으니, 의롭지 않으면서 누리는 부귀는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고 하였다. 아무리 가난한 생활도 그의 즐거움을 변하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안회나 공자가 무엇을 즐거워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주자(周子)는 이같이 공자와 안회의 즐거움을 말한 대목에서 ‘즐거워한 바가 무슨 일인지[所樂何事]’를 깨우치도록 하였고, 정자(程子)도 공자가 ‘즐거워한 바가 무슨 일인지[所樂者何事]’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낙하서생영[洛下書生詠] 진(晉)의 명사(名士)들이 시를 음영(吟詠)하던 것을 말한다. 진서(晉書) 권79 사안열전(謝安列傳)에 “사안은 명성이 대단하여 당시 그를 흠모하는 자가 많았다.……그는 본래 낙하서생의 음영에 능했는데, (낙하서생의 음영이란) 콧병이 있어 소리가 둔탁한 것을 가리킨다. 당시 명류들은 그 음영을 흠모하나 따라갈 수가 없어서 손으로 코를 틀어쥐고 흉내 냈다.[安少有盛名 時多愛慕……安本能爲洛下書生詠 有鼻疾 故其音濁 名流愛其詠而弗能及 或手掩鼻以斅之]”라는 구절이 나온다.
낙하여고목제비[落霞與孤鶩齊飛] 당 고조(唐高祖)의 아들인 이원영(李元嬰)이 홍주자사(洪州刺史)로 있을 때 화려한 누각을 짓고, 당시 그가 등왕(滕王)에 봉해졌었기 때문에 이 누각을 등왕각이라 불렀는데, 그 후 고종(高宗) 연간에 홍주목사(洪州牧使) 염백서(閻伯嶼)가 이 누각을 중수(重修)한 기념으로 9월 9일 중양일(重陽日)에 여기에서 큰 연회를 베풀 적에 초당 사걸(初唐四傑) 가운데 한 사람인 왕발(王勃)이 여기에 참석하여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어 그의 명성이 천재로 일컬어졌던바, 그 등왕각서 중에서도 “저녁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로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라고 한 구절이 가장 회자되었다.
낙하음[洛下吟] 영가(詠歌)의 일종으로 낙하서생영(洛下書生詠)의 약칭으로, 둔탁한 콧소리로 글을 읊조리는 것을 말한다. 낙하서생(洛下書生)이 음영(吟詠)하던 성조(聲調)인데, 특히 진(晉) 나라의 명사(名士)들이 이것을 즐겨 읊었다고 한다.
낙하음[洛下吟] 낙하(洛下), 즉 낙양(洛陽)의 서생(書生)이 읊던 시가라는 뜻이다. 그 성조(聲調)가 중후하고 탁했는데, 특히 낙양에서 강을 건너온 동진(東晉) 때의 명사들이 시를 읊기 좋아하여 낙생영(洛生詠)이라고 불렸다 한다. <世說新語 雅量> 또 이와 관련된 고사로, 사안(謝安)은 본시 코가 맹맹하여 코 막힌 소리로 시를 읊조리자, 다른 사람들이 코를 가리고 그것을 모방하였다고 한다.
낙하지비[落霞之飛] 당(唐) 나라 함형(咸亨) 3년에 염백서(閻伯嶼)가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어 등왕각(滕王閣)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미리 그 사위에게 글을 짓게 하여 자랑하려 하므로 아무도 글을 짓는 이가 없었다. 당나라의 문장가 왕발(王勃)이 마침 아버지의 임소(任所)에 가다가 풍랑을 만나 이곳에 정박하여 참석했는데, 그가 가장 어린 소년으로서 서슴지 않고 글을 지으니 임공이 성내어 아전을 시켜 그 글을 엿보고 아뢰게 했는데, 아뢸 적마다 놀라워하였는데, “떨어지는 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난다.[落霞與孤鶩齊飛]”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염공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는 고사가 있다. <古文眞寶 滕王閣序>
낙하황굉[洛下黃閎] 낙하(洛下)에 사는 황굉(黃閎).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의하면 낙하(落下)는 그 은거처이고 황(黃)이 그의 성(姓)이라고 하였다. 황굉(黃閎)은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천문(天文)에 밝았는데, 낙하에 은거하다가 무제의 부름을 받고 태초력(太初曆)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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