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南陽] 삼국 시대 위(魏) 나라 등양(鄧颺)을 말한다. 등양은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장군이던 등우(鄧禹)의 후예로서, 자(字)는 현무(玄茂)이고, 남양인(南陽人)이다. <三國志 魏書 卷9 曹眞傳 鄧颺>
남양[南陽] 하남성(河南省) 남양현(南陽縣)에 있는 지명으로,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출사(出仕) 전에 농사지으며 살던 곳으로 제갈량(諸葛亮)을 일컫기도 한다. 당시 서서(徐庶)가 유비(劉備)에게 제갈량을 두고, 은거하여 두각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 하여 와룡(臥龍)이라고 일컬었는데, 유비(劉備)가 이곳을 세 차례나 방문하여 자신을 도와줄 것을 청하자, 이에 나아가 승상이 되어 유비를 보필하여 촉한(蜀漢)의 부흥에 힘썼다. 제갈량(諸葛亮)이 후주(後主)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에 “신은 본래 남양에서 밭이나 갈며 난세에 구차하게 목숨이나 보존하며 제후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于亂世, 不求聞達于諸侯.]”라고 하였다. 제갈량은 출사표(出師表)에 올린 그대로, 있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여섯 차례나 중원(中原)을 수복시키려 했으나 끝내 오장원(五丈原)에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시호는 무후(武侯)이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남양귀사 하필구당육합[南陽貴士 何必俱當六合] 남양(南陽)의 귀한 선비들이 어찌 반드시 모두 육합(六合)의 운명을 타고났겠느냐는 뜻으로, 인생의 성쇠(盛衰)・화복(禍福)・수요(壽夭)・귀천(貴賤) 등이 모두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믿을 것이 못 됨을 이른다. 남양(南陽)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고향으로, 광무제(光武帝) 때에 이 지방에서 명사(名士)가 많이 배출되었다. <通鑑節要>
남양룡[南陽龍] 촉한(蜀漢)의 서서(徐庶)가 일찍이 유비(劉備)를 만나 자기 친구인 남양(南陽)의 제갈량(諸葛亮)을 천거하면서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와룡(臥龍: 숨어있는 용)이니, 장군은 어찌 그를 만나 보려고 하지 않습니까?[諸葛孔明者, 臥龍也, 將軍豈願見之乎?]”라고 했던 데서, 바로 제갈량을 가리킨다.
남양불가문[南陽不可問] 후한(後漢)의 건무(建武) 연간에 천하(天下)의 전지(田地)가 실제와 차이가 있다 하여 간전(墾田)의 실상을 조사하라는 광무제(光武帝)의 명령에 따라 모든 주군(州郡)에서 보고서를 올렸는데, 진류(陳留)의 아전이 올린 문서 위에 “영천(潁川)과 홍농(弘農)은 물을 수 있으나 하남(河南)과 남양(南陽)은 물을 수 없다.[潁川弘農可問, 河南南陽不可問.]”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힐문(詰問)하였으나 아전이 자복(自服)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황자(皇子)인 동해공(東海公) 유장(劉莊: 명제明帝)이 나이가 12세였는데, 장막 뒤에 있다가 이를 해명하여 말하기를 “하남(河南)은 황제의 도성(都城)이라 가까운 신하가 많고 남양(南陽)은 황제의 고향이라 가까운 친척이 많으니, 밭과 집이 정해진 한도를 넘어서 기준을 삼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河南帝城多近臣, 南陽帝郷多近親, 田宅踰制, 不可為准.]”라고 하였는데, 황제가 아전을 다시 힐문(詰問)한 결과 과연 동해공(東海公)의 대답과 같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52 劉隆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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