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풍불경[南風不競] 중국(中國) 남방(南方)의 음악(音樂)은 그 성조(聲調)가 웅장(雄壯)하지 못하고 음조(音調)가 미약(微弱)하여 활기가 없다는 뜻으로, 대체로 세력(勢力)이 크게 떨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말엽, 제후들은 진(晉)나라를 맹주로 강포(强暴)한 제(齊)나라를 치려고 포위하고 있었다. 이때, 정(鄭)나라의 자공(子孔)은 국권을 휘두를 욕심으로 초(楚)나라의 영윤(令尹) 자경(子庚)에게 사자를 보낸 대응해주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런데, 자경은 초의 강황(康王)의 권유에 못 이겨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로 쳐 들어갔다. 정나라는 정백(鄭伯)이 제나라를 정벌(征伐)하러 가고 없었기 때문에 자공, 자전(子展)과 자서(子西)가 남아서 지키고 있었다. 자전과 자서는 쳐들어오는 자경의 계략을 미리 알고 방비를 튼튼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경은 이틀간 싸우다 물러가게 되었는데 불운하게도 큰비가 내리고, 또한 한겨울이어서 얼어죽는 말과 병사가 속출하여 전멸상태였다. 초나라 군대가 출동하였다는 소식이 진(晉)나라에 전해지자, 악관(樂官)인 사광(師曠)이 말하였다. “해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자주 북풍을 노래하고, 또 남풍을 노래했지만, 남풍은 생기가 없고 죽음의 소리가 많다. 초나라는 반드시 공이 없을 것이다[不害 吾驟歌北風 又歌南風 南風不競 多死聲 楚必無功].”라고 예언하였다 한다. <남풍(南風),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남풍시[南風詩]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우순(虞舜)이 오현(五絃)으로 된 거문고를 타고 남풍(南風)이란 시를 지어 불렀다.”라고 하였다. <文體明辨 卷1 古歌謠辭>
남풍시[南風詩] 순 임금이 일찍이 손수 오현금을 만들어 타면서 노래한 남풍가(南風歌)를 말한다. 순 임금이 오현금을 처음으로 만들어 남풍가(南風歌)를 지어 불렀는데, 노랫말에 “훈훈한 남풍이여, 우리 백성의 수심을 풀어 주기를. 제때에 부는 남풍이여, 우리 백성의 재산을 늘려 주기를.[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이라고 하였다. <禮記 樂記>
남풍시[南風詩] 옛날 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든 다음 지어 불렀다는 남풍가(南風歌)를 말한다. 그 가사는 치국부민(治國富民)을 기원하는 내용인데 “훈훈한 남쪽 바람이여, 우리 백성의 수심을 풀 만하네. 제때에 부는 남쪽 바람이여, 우리 백성의 살림살이 불릴 만하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라고 하였다. <禮記集說 卷94> <孔子家語 卷8 辯樂解>
남풍아조[南風雅操] 중장통(仲長統)은 후한(後漢) 때의 명사(名士)이다. 그의 낙지론(樂志論)에 “남풍의 고아한 곡조를 타고 청상의 오묘한 가락을 연주한다.[彈南風之雅操 發淸商之妙曲]”고 하였다.
남풍지시[南風之詩] 남풍의 시는 순(舜) 임금이 치국부민(治國富民)을 기원하며 지어 부른 노래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 변악해(辯樂解)에 “순 임금이 오현금을 타고 남풍시를 만들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노여움을 풀겠구나. 남풍이 때에 맞게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풍성하게 하겠구나.’라고 하였다.[舜彈五弦之琴, 造南風之詩. 其詩曰: 南風之薫兮, 可以解吾民之愠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라고 한 것이 보인다.
남풍지언[南豐之言] 남풍(南豐)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증공(曾鞏)을 가리키며, 원풍유고(元豐遺稿) 권16 여왕개보제일서(與王介甫第一書)에 “맹자(孟子)와 한유(韓愈)의 문장이 비록 뛰어나지만 비슷하게 되려고 할 필요는 없다.[孟韓文雖高, 不必似之.]”라고 한 남풍(南豐)의 말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