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영묘출[南海靈猫黜] 남해는 남원(南苑)을 말한다. 북경 영정문(永定門) 밖에 있다. 명 효종(明孝宗)이 홍치(弘治) 15년(1502)에 조서를 내려 식료를 줄이기 위해서 기르던 동물들을 놓아보낸 사실을 말한다. 명사(明史) 권82 식화(食貨)6에 “15년에……간명문의 호랑이와 남해자의 고양이, 서화문의 매와 사냥개, 어마감의 산후, 서안문의 큰 비둘기를 놓아 보냈다.[十五年……於是放去幹明門虎, 南海子貓, 西華門鷹犬, 禦馬監山猴, 西安門大鴿等.]”라고 하였다.
남해왕[南解王] 남해왕은 신라 제2대 임금이다.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적자로, 어머니는 알영(閼英)부인, 비(妃)는 운제(雲帝)부인이다. 혁거세가 재위한 지 61년째 되던 해(4)에 죽자 즉위하였으며, 재위한 지 21년째 되던 해(24) 9월에 죽었다. 남해왕 5년(8) 1월에 탈해를 사위로 삼고 7년(10) 7월에 탈해를 대보(大輔)로 삼아 군국대사를 맡겼다.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南解次次雄>
남해위[南海尉] 진 시황(秦始皇) 33년(B.C. 214)에 진(秦)나라는 남월(南越)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하고는 계림군(桂林郡)・남해군(南海郡)・상군(象郡)을 설치하고 죄인 등 50만 명을 이주시켰다. 또한 진(秦)나라는 통일 이후 전국에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고 군(郡)마다 수(守), 위(尉), 감(監)을 두었다. 위(尉)는 군수(郡守)를 도와 무관과 병사를 관장하는 관직이다.
남해자[南海子] 북경의 영정문(永定門) 밖에 있던 곳으로 명나라 영력(永曆) 연간에 원유(園囿)로 만든 것이다. 청나라 때에는 총위방어(總尉防御) 등을 두어 지켰으며, 그 안에서 동물들을 기르고, 이곳에서 수렵(狩獵)과 열병(閱兵)을 하였다고 한다. 남원(南苑)이라고도 불렀다.
남해정[南陔情]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자식의 효심을 가리키는데, 남해는 본래 시경(詩經)의 편명인데, 지금은 그 제목만 있고 가사는 없으나 서(序)에 “남해는 효자가 부모를 봉양할 일로써 서로 경계하는 노래이다.[南陔, 孝子相戒以養也.]”라고 하였다.
남해조운탑[南海朝雲塔] 애첩(愛妾)과 정다운 한때를 보낸 것을 말한다. 초왕(楚王)과 무산(巫山)의 신녀(神女)가 운몽(雲夢)의 누각 위에서 만나 남녀간의 지극한 환락(歡樂)을 나누었는데, 그 신녀가 떠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로 내리면서[旦爲朝雲 暮爲行雨] 언제나 이 누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전설이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에 나온다. <文選 卷19>
남해편[南陔篇] 생시(笙詩)의 편명으로, 효자(孝子)가 부모 봉양할 일을 서로 경계하는 노래인데, 본시(本詩)는 없어졌고 다만 진(晉) 나라 속석(束晳)의 보망시(補亡詩)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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