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향[南鄕] 남쪽을 바라봄. 남면(南面)과 같다. 鄕(향)은 向(향)과 통하는데 여기서는 面(면)과 같다. 남면(南面)은 군주로서 남쪽을 바라보면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북면(北面)과 반대의 뜻으로 북면(北面)은 신하로서 군주를 섬긴다는 뜻이다.
남헌[南軒] 남송(南宋)의 학자 장식(張栻)의 호이다. 송나라 한주(漢州) 면죽(綿竹) 사람으로 위국공(魏國公) 장준(張浚)의 아들이다. 자는 경부(敬夫)・흠부(欽夫)・낙재(樂齋), 시호는 선(宣)이다. 호굉(胡宏)에게 정자(程子)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호상학파(湖湘學派)의 대표인물로, 호굉(胡宏)과 함께 이학을 공부했고 훗날 주희(朱熹)・여조겸(呂祖謙)과 사우(師友)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이들을 동남삼현(東南三賢)이라고 불렀다. 저서에 남헌역설(南軒易說), 논어해(論語解), 맹자설(孟子說), 남헌집(南軒集) 등이 있다. <宋史 卷429 張栻列傳 등>
남헌[南軒] 남헌은 송(宋)의 학자 장식(張栻)의 호. 그는 학문에 있어 가장 먼저 의리(義利)를 분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위하는 것 없이 하는 것은 의(義)이며 위하는 것 있이 하는 것은 이(利)다.”라고 하였다. <性理大全 卷50 學>
남헌[南軒] 남헌은 송유(宋儒) 장식(張栻)에 대한 학자들의 존칭인 남헌선생(南軒先生)의 약칭이다. 장식은 정자(程子)의 뜻을 좇아 공맹(孔孟)이 인(仁)을 말한 부분을 한데 모아 편집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주희는 배우는 자에게 속히 이루고자 하여 지름길을 좋아하는 마음을 조장하게 하고 귀로 듣고 입으로만 내뱉는 폐단을 불어나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朱子大全 卷31 答張敬夫>
남헌강개[南軒慷慨] 남헌은 남송(南宋) 때의 학자 장식(張栻)의 호이다. 자는 경부(敬夫)・흠부(欽夫)이고, 한주(漢州) 면죽(綿竹) 사람이다. 관직은 우문전 수찬(右文殿修撰)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선공(宣公)이다. 주희(朱熹),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동남삼현(東南三賢)’으로 불린다. 그가 주희에게 보낸 편지에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술이 흥건해지자 기(氣)가 올라 슬픈 노래를 강개(慷慨)하게 불렀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은 평상시 혈기(血氣)에서 발현된 습관을 없애지 못한 소치인 듯합니다. 사소한 문제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됩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南軒集 卷20 答朱元晦秘書>
남헌묘제[南軒墓祭] 남헌은 장식(張栻)의 호이다. 그는 이정(二程)의 학통을 이었는데, 정호(程顥)에 가깝다는 평을 받았으며, 주희・여조겸(呂祖謙)과 함께 ‘동남(東南)의 삼현(三賢)’으로 일컬어졌다. 그가 묘제(墓祭)와 관련하여 주희에게 보낸 글에 “옛날에 묘제를 지내지 않은 것은 그것을 생략해서가 아니고 대개 귀신의 정상을 알아서 묘제를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주는 사당에 있고 묘지는 체백을 매장한 곳인데, 체백을 매장한 곳에 제사를 지낸다면 그 의리가 어떻게 될 것이며 또 어떻게 흠향을 하겠는가. 만약 이치상으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정을 못 이겨서 억지로 행한다면, 이는 허위로 자기 선조를 섬기는 것이다.[古者不墓祭 非有所略也 蓋知鬼神之情狀不可以墓祭也 神主在廟 而墓以藏體魄 體魄之藏而祭也 于義何居而烏乎享乎 若知其理之不可行 而徇私情以强爲之 是以僞事其先也]”라는 말이 나온다. <南軒集 卷20 答朱元晦秘書> 이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논평하며 답한 글이 회암집(晦菴集) 권30 답장흠부(答張欽夫)에 나온다.
남헌선생[南軒先生] 장식(張栻)으로, 자는 경부(敬夫)・흠부(欽夫)・낙재(樂齋), 호는 남헌이다. 저서에 논어해(論語解), 맹자해(孟子解), 남헌역설(南軒易說) 등이 있다.
남헌장씨[南軒張氏] 남송의 이학가(理學家)인 장식(張栻)을 가리킨다. 장식은 자가 경부(敬夫)이고 호가 남헌이며, 한주(漢州) 면죽(綿竹) 사람이다. 영오숙성(穎悟夙成)하여 옛 성인으로써 기약했으며 주희(朱熹)와 더불어 벗이 되었다.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 등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명유(名儒)가 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동남삼현(東南三賢)이라고 불렀다. 저서로는 논어해(論語解), 맹자설(孟子說), 남헌집(南軒集) 등이 있으며 학자들이 남헌선생(南軒先生)이라 칭한다.
남헌집[南軒集] 송나라 학자 장식(張栻)의 문집으로, 1183년에 주자가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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