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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盧仝]~노동기옥[盧仝騎屋]~노동삼완다[盧仝三椀茶]


노동[盧仝]  당(唐) 나라 때의 시인으로 고향은 범양(范陽: 지금의 하북河北 탁현涿縣)이지만 하남성(河南省) 제원시(濟源市) 무산진(武山鎭)에서 초당사걸(初唐四傑) 중 한 사람인 노조린(盧照隣)의 적계자손으로 태어났다. 차를 좋아하여 다치(茶痴)라는 호를 썼고 옥천선자(玉川仙子)라는 자호도 썼다.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소실산(少室山)에 은거하여 독서에 힘쓰면서 시(詩)와 문장을 가다듬었지만 벼슬길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강직한 성격이 맹교(孟郊)를 닮은 듯하면서도 호웅(豪雄)의 기질을 잃지 않아 한맹시파(韓孟詩派)의 중요한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월식시(月蝕詩)로 조정과 권신들의 전횡을 풍자했고, 이 작품으로 권세가들의 미움을 샀다. 당(唐) 문종(文宗) 때 황권 회복을 위한 환관 숙청이 실패로 돌아간 감로지변(甘露之變)을 거치면서 환관 구사량(仇士良)에 의해 살해된 문무백관이 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때 재상 왕애(王涯)의 집에 머물던 노동도 함께 변을 당했다. 한유(韓愈)가 노동의 월식(月蝕) 시를 칭찬하여 지은 시에서 “낙성에 살고 있는 옥천 선생은, 허물어진 집 두어 칸이 있을 뿐이네.[玉川先生洛城裏, 破屋數間而已矣.]”라고 하였다. 옥천자시집(玉川子詩集)이 남아 전한다.

노동[盧仝]  당(唐)나라 제원(濟源) 사람으로 소실산(少室山)에 은거하여 옥천자(玉川子)라고 자호(自號)하였다. 박학하고 시에 뛰어났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조정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차[茶] 마시기를 좋아하고 차의 품평(品評)을 잘했으며 칠완다가(七碗茶歌)로 유명하다. 한유(韓愈)의 시 기노동(寄盧仝)에 “옥천 선생은 낙양성 안에 사는데, 가진 거라곤 낡은 집 두어 칸뿐이라네. 하나인 남자 종은 긴 수염에 머리도 못 싸매고, 하나인 여자 종은 맨다리에 늙어서 이도 없네.[玉川先生洛陽裏 破屋數間而已矣 一奴長鬚不裹頭 一婢赤脚老無齒]”라고 하였다. 일찍이 월식시(月蝕詩)를 지어 원화(元和) 연간의 역당(逆黨)을 풍자하였다. 한유(韓愈)가 그 시를 사랑하여 후하게 대우하였고 그 시를 모방하여 월식시를 지었다. <唐書 176卷>

노동기옥[盧仝騎屋]  한유(韓愈)가 노동(盧仝)에게 부친 시에 “어젯밤에 하인 시켜 보내온 서찰을 보니, 담장 너머 악소년이 못되기 그지없어, 매양 지붕 대마루 타고 앉아 아래를 엿보기에, 온 집안이 놀라 달아나다 발목을 삐곤 한다지.[昨夜長鬚來下狀 隔墻惡少惡難似 每騎屋山下窺瞰 渾舍驚怕走折趾]”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노동미지문[盧東美誌文]  당대(唐代)의 문장가 노동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지은 고공원외노군묘명(考功員外盧君墓銘)을 가리킨다. <唐宋八大家文抄 卷14 考功員外盧君墓銘>

노동삼완다[盧仝三椀茶]  당나라 시인 노동(盧仝)이 지은 다가(茶歌)에 “첫째 잔은 목과 입술을 적셔 주고, 둘째 잔은 외로운 시름을 떨쳐 주고, 셋째 잔은 메마른 창자를 더듬어서 뱃속엔 문자 오천 권만 남았을 뿐이요, 넷째 잔은 가벼운 땀을 흐르게 하여 평생에 불평스러운 일들을 모두 털구멍으로 흩어져 나가게 하네. 다섯째 잔은 기골을 맑게 해 주고, 여섯째 잔은 선령을 통하게 해 주고, 일곱째 잔은 다 마시기도 전에 또한 두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이는 걸 깨닫겠네.[一椀喉吻潤 二椀破孤悶 三碗搜枯腸 惟有文字五千卷 四椀發輕汗 平生不平事 盡向毛孔散 五椀肌骨淸 六椀通仙靈 七椀喫不得 也唯覺兩腋習習淸風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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