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팽[老彭] 노팽(老彭)은 8백 세를 살았다는 팽조(彭祖)로, 이름은 전경(籛鏗)이라 한다. 은(殷)나라의 대부이다. 일설에는 노담(老聃)과 팽조(彭祖)의 병칭이라고 하는데, 모두 장수했다고 한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의 “전술(傳述)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함은 내 삼가 우리 노팽에게 견주노라.”라고 한 말이 있다.
노포[老圃] 노포(老圃)는 채소(菜蔬)를 가꾸는 데 경험이 많은 원예사로,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번지(樊遲)가 농사일을 배울 것을 청하자, 공자께서는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채전(菜田) 가꾸는 일을 배울 것을 청하자, ‘나는 늙은 원예사만 못하다.’라고 하셨다.[樊遲請學稼, 子曰: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吾不如老圃.]”라고 보인다. 북송(北宋)의 명재상 한기(韓琦)는 봉호가 위공(魏公), 자는 치규(稚圭), 호는 공수(贛叟),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인종(仁宗) 천성(天聖) 5년(1027) 진사시에 급제하고 영종(英宗) 때 우복야(右僕射)에 제수되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한기가 구일수각(九日水閣)의 시에서 “늙은 원예사가 가꾼 가을빛 담박함에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선 늦게 피는 국화의 향기를 보라.[不羞老圃秋容淡, 且看寒花晩節香.]”라고 하여 자신의 노년의 절개가 높음을 자부하였다.
노포[老圃] 노포는 고원(故園)의 뜻인데, 송(宋) 나라 한기(韓琦)의 구월수각(九月水閣) 시에 “노포의 말끔한 가을빛에 부끄러워하며 늦가을 국화꽃 향기를 보네.[雖慚老圃秋容淡 且看寒花晩節香]”라고 하였다.
노포[魯褒] 서진(西晉) 시대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원도(元道)이다. 학문을 좋아하고 들은 것이 많았으나, 가난한 생활에도 일생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진 혜제(晉惠帝) 원강(元康) 연간 이후로 기강이 크게 무너져 국정이 문란하고 뇌물이 성행하자, 노포(魯褒)가 성명을 숨긴 채 전신론(錢神論)을 지어 “돈은 귀신에 통한다.”고 하여 세상의 탐욕스런 풍조를 풍자했다. 거기에 “돈만 있으면 죽을 자도 살아날 수 있고 귀한 자도 천하게 될 수 있다.[失之則貧弱, 得之則富昌. 無翼而飛, 無足而走, 解嚴毅之顏, 開難發之口.]”는 구절이 있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魯褒>
노포[露布] 사실을 환히 드러내어[露]천하에 알리는[布]포고문인데, 주로 전승(戰勝)을 급히 알릴 때에 사용하였다. 봉함하지 않은 조서(詔書)나 주장(奏章)도 노포(露布)라 부른다.
노포[露布] 승첩을 알리는 문서이다.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 그 전과를 기록하여 보고하는 글을 말하는데, 밀봉하지 않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57 李雲列傳> 당(唐)나라 봉연(封演)이 지은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 노포(露布)에 “노포는 승첩을 알리는 문서의 별명이다. 제군(諸軍)이 적병을 격파하면 비단에다 글을 써서 장대에다 걸어놓는데, 병부(兵部)에서 이것을 노포라고 이른다.”라고 하였다.
노포[露布] 격문(檄文)이나 승첩(勝捷)의 글을 말한다. 백서(帛書)를 죽간(竹竿)에 매달아서 승리를 보고했는데, 이를 노포라 하였다.
노포문[露布文] 첩서(捷書)의 별칭으로 적군을 격파한 뒤 베에다 그 사실을 적어 장대 끝에 달아 세워 선포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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