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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산[祿山]~녹산우단[祿産右袒]~녹산유갑[鹿山襦匣]


녹산[祿山]  당현종(唐玄宗) 때 난을 일으킨 안록산(安祿山)을 가리킨다. 돌궐(突厥)의 후예로 당(唐) 나라 때의 무장이 되었으며 안사의 난[安史之亂]을 일으켜 이듬해 스스로 황제를 선언하고 대연(大燕)을 세워 당조를 전복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녹산[祿山]  안녹산(安祿山)을 가리킨다.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14년(755) 11월에 어양(漁陽)에서 20만 대군으로 반란을 일으켜 12월에 수도를 함락하고 이듬해 1월에 웅무황제(雄武皇帝)라고 칭하면서 국호를 연(燕)으로 고쳤는데, 아들 경서(慶緖)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녹산[祿山]  안녹산(安祿山)을 말한다. 본성은 강(康)이며 초명은 아락산(阿犖山) 또는 알락산(軋犖山)이라 하기도 한다. 당 현종(唐玄宗)의 총애를 받아 번장(藩將)의 요직에 등용되고, 뒤에 양귀비(楊貴妃)의 양아(養兒)가 되어 반역을 모의하게 되었다. 운중 태수 하동 절도사(雲中太守河東節度使)로 기병(起兵)하여 경사(京師)를 함락하고 자칭 웅무황제(雄武皇帝)라 하다가, 그의 아들 경서(慶緖)에게 살해되었다. <唐書 卷225>

녹산덕공가[鹿山德公家]  녹산(鹿山)을 방덕공(龐德公)이 은거한 녹문산(鹿門山)에 빗대어 한 말이다. 방덕공은 후한(後漢)의 은자(隱者)로 한 번도 도회지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간절한 요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고서 처자를 데리고 녹문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다 생을 마쳤다.<尙友錄 1>

녹산우단[祿産右袒]  녹산(祿産)은 여록(呂祿)과 여산(呂産)의 약칭이다. 우단(右袒)은 어느 한편만 비호하는 것이다. 한 고조(漢高祖)의 여 황후(呂皇后)가 정권을 쥐었을 때, 여산을 양왕(梁王)으로 봉작하여 상국(相國)을 삼고, 여녹을 조왕(趙王)으로 봉작하여 상장군(上將軍)을 삼고서 경계하기를 “고조가 대신들과 언약한 말이 ‘유씨(劉氏)가 아니고서 임금이 되는 자는 천하가 함께 쳐야 한다.’고 했었는데, 지금의 임금은 여씨이므로 내가 죽으면 변이 생길까 싶으니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호위해야 하며 송상(送喪)을 하여 잠시라도 사람들에게 견제되게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여후가 죽자, 주발(周勃) 등에게 베임을 당하였다. <前漢書 卷97>

녹산유갑[鹿山襦匣]  녹산의 저고리 상자. 의종(毅宗)의 사릉(思陵)이 훼손되지 않고 무탈함을 말한 것이다. 녹산(鹿山)은 녹마산(鹿馬山)으로, 이곳에 본래 전귀비(田貴妃)의 묘를 만들고 있었는데, 도적들이 의종과 황후의 재궁(梓宮)을 끌고 이곳에 이르자, 지역의 사민(士民)들이 모금하여 의종과 황후의 재궁을 거두어 전귀비의 묘에 합장하였다 한다. <讀禮通考 卷93 葬考12> 의종(毅宗)은 1628년에서 1644년까지 재위했던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숭정(崇禎) 17년(1644) 3월 19일 농민 반란을 이끈 틈왕(闖王) 이자성(李自成)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자, 황후와 황자, 공주들을 모두 죽게 하고, 자신도 자신의 시체를 훼손할지언정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만세산(萬歲山)에서 순국(殉國)하였다.

녹산자유연지자[祿山藉幽燕之資]  녹산(祿山)이 유연(幽燕)의 막강한 군대를 장악하였다. 녹산(祿山)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무장 안녹산(安祿山)으로, 반란을 일으켜 경사(京師)를 함락시키고 스스로 웅무 황제(雄武皇帝)라고 일컬었다. 유연(幽燕)은 당(唐)의 유주(幽州)가 전국 시대 연(燕) 나라의 판도에 해당되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이곳이 바로 안녹산의 본거지로서 후대에 한맹(悍猛)한 군대를 일컬을 때 곧잘 인용하는 표현이다. <舊唐書 卷200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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