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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아전[籠鵝全]~농암[聾暗]~농엄[醲釅]~농염[濃艶]~농영[弄景]


농아전[籠鵝全]  진(晉) 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거위를 매우 좋아하여 산음(山陰)의 도사(道士)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써 주고 그 대가로 거위를 싸 간 고사에서 온 말이다.

농암[農巖]  경기도 영평(永平)의 동쪽 백운산(白雲山) 아래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디 응암(鷹巖)이었으나 김창협이 임의로 바꾸었다. 김창협이 1679년(숙종5)에 아버지 김수항의 명에 따라 이곳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들어가 살았다. <農巖集 卷35 年譜上>

농암[聾暗]  귀머거리와 벙어리라는 뜻으로, 윗사람과 아랫사람 간에 서로 정의(情宜)가 통(通)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호이다. 자는 중화(仲和)이고, 호는 농암 혹은 삼주(三洲)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1669년(현종10) 19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682년(숙종8)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진도(珍島)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아버지의 죄가 풀리고, 그에게 대제학(大提學) 등의 벼슬이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성리설은 대체로 이이(李珥)보다는 이황(李滉)에 가까웠으며,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문집에 농암집(農巖集), 저서에 농암잡지(農巖雜識),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등이 있다.

농암[籠巖]  서강(西江)의 밤섬 근처에 있던 바위이다.

농암선생전[籠巖先生傳]  농암은 김주(金澍)이다. 고려 말에 중국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조선이 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이유로 입국하지 않고, 집안에는 자신을 죽은 것으로 치라는 유언을 남기고 중국의 오초(吳楚) 지방으로 떠났는데, 후에 김주의 사위라는 사람이 집안사람을 찾아 이 사실이 알려졌다고 한다.

농엄[醲釅]  진하고 맛 좋은 술을 이른다.

농연말도[攏撚抹挑]  이 넉 자는 모두 비파를 연주하는 기교를 나타내는 말이다. 각각 현을 누르는 것, 비트는 것, 쓰다듬는 것, 손톱으로 퉁기는 것이다.

농염[穠豔]  농염(穠艶). 염(豔)과 염(艶)은 동음동의어. 부귀하고 호화스러운 것.

농염[濃艷]  한껏 무르익어 아름답다. 화려하다. 호사스럽고 시끄럽게 즐기기를 좋아하다.

농염[濃艶]  화사하리만큼 아름다움. 한껏 무르익은 아름다움. 아주 화려함. 요염함.

농영[弄景]  자신의 그림자를 희롱하는 것을 가리킨다. ‘景’을 ‘영’으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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