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공과영[端拱寡營] 단정히 팔짱끼고서 경영함이 적음. 명사(明史) 권19 목종본기(穆宗本紀)의 찬(贊)에 나오는 말로 “찬(贊)하여 말한다. ‘목종은 제위에 있었던 6년 동안 소매를 드리우고 앉아 많은 일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몸소 검약을 실천하여 상식(尙食)에서 해마다 수만을 절약하였다. 엄답(俺答)을 봉공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들을 쉬게 하고 변경을 안정시켰다. 선왕의 뒤를 이어 나라를 지켰으니, 훌륭한 군주라고 일컬을 수 있다. 다만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서로 알력을 다투어 문호가 점점 열렸으나 황제가 제왕의 기강을 엄숙하게 바로잡고 구습을 다스리지 못하였다. 아마도 또한 너그러움은 넘치되 강명함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贊曰:穆宗在位六載, 端拱寡營, 躬行儉約, 尙食歲省巨萬. 許俺答封貢, 減賦息民, 邊陲寧謐. 繼體守文, 可稱令主矣. 第柄臣相軋, 門戶漸開, 而帝未能振肅乾綱、矯除積習. 蓋亦寬恕有餘, 而剛明不足者歟.]”라고 한 데서 보인다.
단공무위[端拱無爲] 임금이 단정하게 공수(拱手)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음. 지방관을 잘 선발하여 등용한다면 군주가 단정히 앉아서 팔짱을 끼고 함이 없어도 천하가 다스려짐을 이른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에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혹자는 국가의 정무(政務)를 처리하느라 수고롭기도 하고, 혹자는 단정히 팔짱을 끼고 하는 일이 없기도 하여 서로 잘함과 잘못함이 있었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自古帝王, 或勤勞庶政, 或端拱無爲, 互有得失, 何為而可?]”라고 묻는 데서 나온다.
단공부귀내핍[但恐富貴來逼]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문사(文詞)에 뛰어난 양소(楊素)를 가상히 여겨 일찍이 그에게 이르기를 “경은 상(相)이 좋으니 스스로 힘쓸 것이요, 부귀하지 못할까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니, 양소가 대답하기를 “신은 다만 부귀가 신에게 절로 오는 것을 염려할 뿐이요, 부귀를 도모할 마음은 없습니다.[臣但恐富貴來逼臣 臣無心圖富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단공상책[檀公上策] 달아나는 것. 위기를 신속하게 면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단공은 유송(劉宋) 때의 장군 단도제(檀道濟)이다. 그는 지략(智略)이 뛰어나서 고조(高祖)를 따라 북벌(北伐)할 적에 전봉장(前鋒將)으로 누차 공을 세워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났는데, 뒤에 남제(南齊)의 왕경칙(王敬則)이 일찍이 매우 급한 때를 당하여 어떤 사람에게 고하기를 “단공의 삼십육책(三十六策) 가운데 주(走) 자가 상책이었으니, 너희들은 응당 급히 도주해야 한다.[檀公三十六策, 走是上計, 汝父子唯應急走耳]”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의되어 불리하면 도주하는 것을 말한다. <宋書 卷43 檀道濟列傳>
단공암랑지상[端拱巖廊之上] 이는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에 “들으니 요순(堯舜)시대에는 암랑(巖廊)에서 여유로이 옷깃을 내려뜨리고 팔짱 낀 채 작위함이 없이 다스려 천하가 태평하였다.[盖聞虞舜之時 游於巖廊之上 垂拱無爲 而天下太平]”라고 한 데서 의거한 것이다.
단공위해[但恐爲害] 진(晉)나라 두예(杜預)가 고을을 다스릴 때, 서울의 귀족들을 자주 대접하였는데, 혹자가 그 까닭을 묻자, 두예는 “다만 그들이 해를 끼칠까 염려한 것이지,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吾但恐爲害 不求益也]”라고 대답하였다. <晉書 卷34 杜預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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