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檀君] 역대건원고(歷代建元考) 권9 조선(朝鮮)에 “단군이 태백산에 내려와 요 임금 25년 무진에 평양에 도읍하였다.[檀君降于太白山, 以唐堯二十五載戊辰, 立都平壤.]”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 상(紀異上)에도 위서(魏書)의 말을 인용하여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단군대[檀君臺] 평안도 묘향산의 향로봉(香爐峯) 중턱에 있는 바위로 단군이 궁술(弓術)을 연마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단궁[檀弓] 예기(禮記)의 편명이다.
단궁정돌[檀弓鄭突] 글짓기만 전념하여 경서에 무식한 것을 말한다. 서거정(徐居正)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세종 때에 과거에만 전념하던 사람들은 변려문(騈儷文)만 힘쓰고 반 줄의 경서(經書)도 읽지 않았다. 경서를 강의하는 논의는 문종(文宗)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시작되었다. 문종이 친히 강을 묻는데, 한 서생은 서경(書經)을 강하면서 ‘혁상(衋傷)’이라는 ‘혁(衋)’을 ‘진(盡)’ 자로 읽고, 한 서생은 시경(詩經)을 강하면서 대아(大雅)에 있는 ‘전히(殿屎)’의 ‘히(屎)’를 ‘미(尾)’라 하고, 한 서생은 예기(禮記)를 강하면서 ‘단궁(檀弓)’을 단목(檀木)의 활[弓]이라 하고, 한 서생은 춘추(春秋)를 강의하면서 ‘정돌(鄭突)’의 ‘돌(突)’을 갑자기 어른이 된다는 뜻의 돌승(突升)이라 하였다. 유생들이 모두 욕하면서 ‘혁(衋)과 히(屎)는 음이 변한 것이요, 궁(弓)과 돌(突)은 이름을 바꾼 것이니, 삼장(三場 과거의 과목인 시(詩)・부(賦)・의(疑)를 말함)은 되지만 오경(五經)은 어렵도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大東野乘>
단궤[檀几] 단궤총서(檀几叢書) 단궤(檀几)는, 옛날 ‘칠보 장식을 한 신령스런 박달나무 안석[七寶靈檀几]’의 표면에 보는 사람의 생각이 반영된 글자가 나타났다는 고사를 빌려, 이 책 역시 사람마다 관심 분야에 따라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단규[端揆] 재상(宰相)의 별칭인데, 재상은 백관(白官)의 우두머리로 국정(國政)을 총괄하므로 일컫는 말이다. 구당서(舊唐書) 장열전(張說傳)에 “단규(端揆)는 만방의 법식이 된다.”고 하였다.
단규[段規] 위환자(魏桓子)의 가신(家臣) 중 우두머리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한강자(韓康子)의 가신의 우두머리라고 하였다.
단규[段規] 전국 초기 진(晉)나라의 경(卿) 한강자(韓康子)의 가신(家臣)이다. 뒤에 한(韓)나라의 상(相)이 되었다. <國語 晉語 9>・<韓非子 十過>・<戰國策 韓策 1>
단규원심이조모[段規怨深而造謀] 단규(段規)는 한강자(韓康子)의 모신(謀臣)이다. 지백(智伯)이 정(鄭)나라를 정벌하고 위(衛)나라에서 돌아와 삼경(三卿)과 함께 남대(藍臺)에서 연회를 벌이는 자리에서 단규(段規)에게 모욕을 준 일이 있었다. 단규(段規)가 이에 원한을 품고 있다가 지백(智伯)이 진양(晉陽)을 포위하고 성안으로 강물을 몰아넣을 적에, 한강자(韓康子)에게 지백(智伯)을 배반할 것을 건의하고 강물을 도리어 지백(智伯)의 진영으로 돌려 넣게 함으로써, 지백을 생포하고 지씨(智氏) 일족을 멸족시켰다. <國語 권15 晉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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