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담조[啖棗]~담조조광[啖助趙匡]~담조육씨[啖趙陸氏]~담종[湛宗]


담조[啖棗]  한(漢) 나라 왕길(王吉)의 이웃집 대추나무 가지가 왕길의 집 뜨락으로 넘어와 있자, 그의 처가 그 대추를 따서 왕길에게 먹도록 하였는데, 왕길이 그 사실을 나중에 알고는 처를 쫓아냈다가 마을 사람들의 간청으로 다시 돌아오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서(漢書) 권72 왕길전(王吉傳)에 “왕길이 젊은 날 공부를 할때 장안에서 지냈는데, 동쪽 이웃의 대추나무가 왕길네 마당 위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왕길의 부인이 그 대추를 따서 왕길에게 먹였다. 왕길이 나중에 자신이 먹은 대추가 이웃집 나무에서 딴 것을 알고 부인을 내쫓았다. 그것을 알게 된 이웃에서 대추나무를 베어내려 하자 이웃들이 말리면서 왕길에게도 부인을 데려오라 간절하게 청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이 일에 대한 말들이 퍼졌다. ‘동쪽 이웃의 대추나무에서 딴 대추를 먹고 왕자양이 부인을 내쫓았다가 이웃집에서 대추를 다 딴 뒤에 부인을 데려왔다네.’ 왕길이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始吉少時學問, 居長安. 東家有大棗樹垂吉庭中, 吉婦取棗以啖吉. 吉後知之, 乃去婦. 東家聞而欲伐其樹, 隣里共止之, 因固請吉令還婦. 里中爲之語曰:「東家有樹, 王陽婦去; 東家棗完, 去婦復還.」 其歷志如此.]”라고 하였다.

담조조광[啖助趙匡]  담조(啖助)는 자가 숙좌(叔佐)이며 조주(趙州) 사람이다. 춘추삼전(春秋三傳)을 종합하여 춘추통례(春秋統例) 6권을 저술하였다. 조광(趙匡)은 자가 백순(伯循)이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담조(啖助)에게 배워 춘추(春秋)를 잘 알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조부자(趙夫子)로 불렀다.

담조육씨[啖趙陸氏]  담조(啖助)·조광(趙匡)·육질(陸質)을 가리킨다. 담조(啖助)는 조주(趙州) 사람인데 뒤에 관중(關中)으로 옮겼다. 자는 숙좌(叔佐)이다. 현종(玄宗) 천보(天寶) 말기에 임해위(臨海尉)·단양주부(丹陽主簿)를 지낸 뒤에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춘추(春秋)에 조예가 깊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장단점을 상고하고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10년 만에 춘추집전(春秋集傳)을 완성하였다. 조광(趙匡)은 하동(河東) 사람이며, 자는 백순(伯循)이다. 담조(啖助)의 제자이다. 육질(陸質) 등과 함께 담조(啖助)의 춘추집주총례(春秋集注總例)를 다듬어 춘추집전찬례(春秋集傳纂例)를 편찬하였다. 육질(陸質)은 당(唐)나라의 경학가(經學家)로 본명은 순(淳)이었으나, 당 헌종(唐憲宗)의 이름자를 피해 개명하였다. 좌습유(左拾遺)·태상박사(太常博士)·신주자사(信州刺史)를 역임하였다. 경학(經學) 중에서도 춘추(春秋)에 더욱 정통하였고, 스승 담조(啖助)의 영향을 받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보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중시하였다. 담조(啖助)와 조광(趙匡)의 학설을 정리하여 춘추미지(春秋微指) 이외에 춘추집전찬례(春秋集傳纂例)·춘추집전변의(春秋集傳辨疑)·춘추집주(春秋集註)를 저술하였다. 유종원(柳宗元), 여온(呂溫) 등과 교류하였다.

담조율[啖棗栗]  대추와 밤을 먹는다는 말이다.

담종[湛宗]  삼족(三族)을 몰살시키는 것을 말한다.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