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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위[黨太尉]~당태종[唐太宗]~당토이생[當吐而生]


당탑련사방[鼞鞳連四方]  옛날에는 일식(日蝕)이 있으면 징을 치고 북을 쳐서 일식을 구(救)한다는 풍습이 있었다.

당태위[黨太尉]  당 태위는 중국 송나라 때 사람으로 태위(太尉) 벼슬을 지낸 당진(黨進)을 말한다. 일찍이 학사(學士)인 도곡(陶穀)이 당진의 집에서 가기(歌妓)를 데려온 뒤에 정도(定陶)를 지나다가 쌓인 눈을 떠서 차를 끓이며 “당 태위의 집에서는 응당 이런 것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黨太尉家, 應不識此.]”라고 자랑하자, 그 가기가 “그분은 멋이 없는 분이시니, 어찌 이런 정경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금박을 입힌 따뜻한 휘장 아래서 제가 조금씩 술을 따르고 나직이 노래하면 양고(羊羔)라는 좋은 술을 마실 뿐이었습니다.[彼粗人也, 安有此景? 但能銷金煖帳下, 淺斟低唱, 飮羊羔美酒耳.]”라고 대답하니, 도곡이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고사가 전한다. 녹창신화(綠窗新話) 상강근사(湘江近事)에 보인다.

당태종[唐太宗]  599~649(재위 626~649). 당(唐)나라 2대 황제 이세민(李世民)으로, 시호는 문황제(文皇帝)이다.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2남으로, 부친을 도와 수(隋)나라 말에 거병했던 세력들을 평정하고 당(唐)을 건국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진왕(秦王)이 되었다. 무덕(武德) 9년(626년)에 현무문(玄武門)의 변을 일으켜 형인 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동생 이원길(李元吉)을 죽이고 부친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이후 균전제(均田制), 조용조(租庸調), 부병제(府兵制) 등을 시행하고 돌궐(突厥)과 고창(高昌) 등 주변 나라들을 제압함으로써 국내외로 많은 치적을 세워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룩하였다. 태자를 위하여 제범(帝範)을 저술하였고, 진서(晉書)와 수서(隋書) 등을 편수하게 하였으며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여 역대의 경전 해석을 통일하였다.

당태종[唐太宗]  본명은 이세민(李世民). 아버지는 이연(李淵)이고, 어머니는 두(竇)씨이다. 중국 역사상 유수의 영주(英主)로 알려져 있으며, 북방 민족의 피가 섞인 무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하고 사려 깊으며, 무술과 병법에 뛰어난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도 갖추어 소년 시절부터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내란의 양상이 짙어지자 수나라 타도의 뜻을 품고 태원(太原) 방면 군사령관이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수립하였다. 그 뒤 군웅을 평정하고 국내 통일을 실현시킨 것은 20살 안팎인 그의 활동에 힘입었다. 이를 질투한 형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과 다투어 마침내 그들을 쓰러뜨리고, 626년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이어서 돌궐을 비롯한 사방의 이민족을 제압하고, 여러 민족의 추장들에게 천가한(天可汗)이란 존호를 받았다. 이를 통해 당나라는 번한(蕃漢)의 양 사회를 포용하는 세계 제국이 되었다. 양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명신 위징(魏徵)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심을 누르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극히 공정한 정치를 하기에 힘썼다. 그러므로 그의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 칭송받았다.

당태종[唐太宗]  당 태종은 원래 왕도 정치(王道政治)보다는 패도(覇道)를 추구한 제왕이었는데, 즉위한 이래로 멸망한 수(隋) 나라를 거울삼아 문치(文治)를 숭상하면서 위징(魏徵) 등 유능한 인재들을 대거 발탁하여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따른 결과,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가 번영하는 등 태평 시대를 구가하였으므로 역사상 정관지치(貞觀之治)로 일컬어지기에 이르렀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실제로는 무력을 행사하면서 형식적으로 인의를 가탁하는 자는 패자(覇者)이니, 패자는 반드시 대국을 소유해야 하겠지만, 덕을 위주로 인의를 행하는 이는 왕자(王者)이니, 왕자는 대국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以力假仁者覇 覇必有大國 以德行仁者王 王不待大]”라는 말이 나온다. 위징은 태종(太宗)에게 전후 200여 차례에 걸쳐 상소문을 올리면서 인의에 입각한 성현의 정치를 역설하였으며, 황제가 노여워해도 안색을 변하지 않고 직간(直諫)을 하였으므로, 그가 죽자 태종이 ‘하나의 거울[一鑑]’을 잃었다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71 魏徵列傳>

당토이생[當吐而生]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에 “나의 자손은 神明의 후예이기 때문에 다른 動物과 같을 수 없으니, 응당 입으로 토해 생산할 것이다.[吾子孫神明之後, 不可與物同, 當吐而生.]”라고 한 데서 보인다. 논형(論衡) 기괴(奇怪)에 “토끼는 털을 핥으면 새끼를 배고, 새끼를 낳을 때는 입으로부터 나온다.[兎吮毫而懷子 及其子生 從口而出]”는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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