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견[岱畎] 대견(岱畎)은 대산(岱山)의 골짜기이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의 청주(靑州) 편에 “공물은 소금과 갈포이고 해산물은 섞어서 바치며 대산의 골짜기에서 나오는 생사(生絲)와 모시, 납과 소나무와 괴이한 돌을 바친다.[厥貢:鹽絺, 海物惟錯, 岱畎絲枲鉛松怪石.]”라고 하였다.
대겸년[大歉年] 대단히 심한 흉년. 대단히 큰 흉년(凶年)이 든 해를 대살년(大殺年), 대무지년(大無之年), 대겸년(大歉年)이라 한다. 반대로 큰 풍년이 든 해를 대풍년(大豐年) 또는 대유년(大有年)이라 한다.
대경[代耕] 대경(代耕)은 관리가 녹봉을 받는 것이 한 농부가 백묘(畝)를 받아 농경하는 소득과 같게 한 것을 말한다. <孟子 梁惠王下>
대경[代耕] 대신하여 경작하다. 농사 대신 다른 방법으로 생계를 도모하다. 벼슬길에 나가다. 관리가 되다. 벼슬살이 하다. 벼슬을 얻으면 밭을 갈지 않고 녹봉(祿俸)을 받아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예기대전(禮記大全) 권25에 “벼슬하면 농사를 짓지 않으니, 녹봉이 경작의 대체가 되기에 충분하다.[仕則不稼 禄足以代耕也]”라는 말이 있다.
대경[代耕] 모든 벼슬아치의 녹봉(祿俸)을 정함에 있어 각 등급에 따라 각각 농부(農夫)의 경지(耕地)를 표준으로 삼아서 고하(高下)를 정해 주는 것이다. 예컨대, 제후(諸侯)의 하사(下士)는 상농부(上農夫)에 비등하므로 그의 녹봉은 상농부에 대신할 만큼 주고, 중사(中士)는 하사보다 배(倍)를 주는 등이다. 이는 곧 벼슬아치를 의미하는 말이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의 “제후의 하사를 상농부에 비교해 보더라도, 그 녹봉을 가지고 농사짓는 일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다.[諸侯之下士 視上農夫 祿足以代其耕也]”라고 하였다.
대경[大經] 당송(唐宋) 시대에 대학(大學)의 교수(敎授) 과목, 또는 진사시(進士試)에서의 경서의 구분으로서, 경서의 분량에 따라 대·중·소로 나누었는데,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달랐으나, 대경은 예기(禮記)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가리켰다. 당서(唐書) 선거지(選擧志)에 “예기(禮記)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 대경(大經)이고, 시경(詩經)과 주례(周禮)·의례(儀禮)가 중경(中經)이고, 역경(易經)·서경(書經)·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 소경(小經)이다.[凡禮記春秋左氏傳 爲大經 詩周禮儀禮 爲中經 易尙書春秋公羊傳穀梁傳 爲小經]”라고 하였다.
대경[大經] 당송(唐宋) 시대 국자감(國子監)의 교과(教課) 및 진사과(進士科)에 고시(考試)하는 경서(經書)는 분량과 난이도를 따져 대(大)·중(中)·소(小)의 세 등급으로 분류하였는데, 당(唐)나라에서는 예기(禮記)와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대경(大經)으로, 시경(詩經)·주례(周禮)·의례(儀禮)를 중경(中經)으로, 서경(書經)·역경(易經)·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소경(小經)으로 삼았다.
대경[大經] 대경(大經)은 공명정대한 원리와 법칙을 가리킨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昭公) 15년조에 “예는 왕의 대경(大經)이다.[禮 王之大經也]”라고 하였다.
대경[帶經] 밭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독서를 좋아한다는 말인데, 한나라의 예관(倪寬: 兒寬)과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상림(常林)과 진(晉)나라의 황보밀(皇甫謐) 등이 모두 경서를 휴대하고[帶經] 농사를 지으면서 쉴 때마다 독서했다고 한다. 한서(漢書) 권58 예관전(兒寬傳)에 전한(前漢)의 예관에 대해 “품팔이를 할 적에 늘 경서를 몸에 지니고 밭일을 하다가 휴식할 때면 독송하였다.[時行賃作, 帶經而鋤, 休息輒讀誦.]”라고 하였다.
대경[對境] 대치(對峙)하고 있는 상대방 국가. 국경(國境)의 맞은 편. 객관(客觀)의 사물(事物)이나 대상.
대경[臺卿] 자(字)가 공대(公臺)인 진궁(陳宮)에 대한 경칭이다. 진궁은 일찍이 조조(曹操)를 따르다가 그 인격에 회의를 품고 떠나 여포에게 가서 좋은 계책을 많이 제공하였으나 여포가 매번 듣지 않았다. 여포와 함께 조조에게 붙잡혔을 적에, 조조가 “공대는 평소에 지혜가 많다고 자처하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가?[公臺平生自謂智有餘 今意何如]”라고 묻자, 진궁이 여포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다. 만약 내 말을 들었더라면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是子不用宮言 以至於此 若見從 未可量也]”라고 답변하고는 의연히 죽음을 택하였다. 이 내용은 여포전(呂布傳)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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