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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교[待敎], 대교[大校], 대교[大轎], 대교[大窖], 대교약졸[大巧若拙]


대교[待敎]  규장각의 관직으로 정7품부터 정9품까지 있다.

대교[大校]  장수(將帥)를 일컫는 말로, 사기(史記) 표기열전(驃騎列傳)에 “표기장군 또한 기병 5만 명을 거느렸으며, 군수물자는 대장군의 군대와 대등할 정도였으나 부장(副將)이 없었다. 이에 이감(李敢) 등을 모두 대교(大校)로 임명해 비장(裨將)의 역할을 하게 하였으며 대군(代郡)과 우북평에서 출병하여 1천여 리 진격해 흉노의 좌익부대와 맞섰는데, 이 때 흉노의 군사를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공로는 대장군을 초과하였다.[驃騎將軍亦將五萬騎, 車重與大將軍軍等, 而無裨將. 悉以李敢等為大校, 當裨將, 出代·右北平千餘里, 直左方兵, 所斬捕功已多大將軍.]”라는 말이 있다.

대교[大轎]  특별히 여덟 사람이 드는 가마를 가리킨다. 청나라 때에는 3품 이상의 문관이 탔는데, 북경 내에서는 네 명의 가마꾼만 허용되고 북경을 벗어나야 여덟 명의 가마꾼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청나라 공상임(孔尙任)이 쓴 희곡 도화선(桃花扇) 체사(逮社)에 “우리 원 나리께서 오늘 망옥(蟒玉 옛 고관의 복식)을 하사받아 큰 가마를 타고 손님을 찾아뵈었다.[我阮老爺今日欽賜蟒玉, 大轎拜客.]”라는 구절이 보인다.

대교[大窖]  한(漢)나라의 충신인 소무(蘇武)가 무제(武帝) 때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의 선우(單于)로부터 항복하라는 회유와 협박을 받고도 끝내 굴하지 않은 채 큰 움집[大窖] 속에 갇혀 쌓인 눈을 녹여 마시고 전모(氈帽)를 뜯어 먹으면서도 끝까지 한나라 사신의 정절(旌節)을 지키다가 19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권54 소건전(蘇建傳) 소무(蘇武)에 “선우가 더욱 항복시키고 싶어 곧 소무를 큰 구덩이 가운데 유폐시키고는 물과 식량을 끊었다. 그때 하늘에서 눈이 내려 소무가 누워서 눈과 양탄자의 털을 씹어 먹으며 며칠이 지나도록 죽지 않았다. 흉노는 신이 돕는다고 생각하여 이윽고 북해 가 인적이 없는 곳으로 옮기고 숫양을 치게 했다.[單于愈益欲降之 乃幽武置大窖中 絶不飮食 天雨雪 武臥齧雪與旃毛幷咽之 數日不死 匈奴以爲神 乃徙武北海上無人處 使牧羝]”라고 하였다.

대교약졸[大巧若拙]  훌륭한 기교(技巧)는 도리어 졸렬(拙劣)한 듯함. 아주 교묘(巧妙)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재주를 자랑하지 아니하므로 언뜻 보기엔 서투른 것 같다는 의미이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45장에 “크게 곧은 것은 굽은 것처럼 보이고, 크게 교묘한 것은 졸렬한 것처럼 보이고, 큰 언변은 어눌한 것처럼 보인다.[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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