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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궤[臺餽], 대귀[大歸], 대귀릉[大龜陵], 대규[大逵], 대규[大圭], 대규[戴逵]


대궤[臺餽]  조정에서 하사한 물품을 가리킨 말이다.

대귀[大歸]  여자(女子)가 이혼(離婚)을 하고 친정(親庭)으로 돌아옴. 출가한 부인이 시집에서 나와 영원히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 말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은퇴하여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대귀[大歸]  근본(根本)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죽음을 이르는 말. 필연적(必然的)으로 추향(趨向)하는 곳을 이른다.

대귀릉[大龜陵]  무열왕릉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다. 무열왕릉 경내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비신(碑身) 없는 태종 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의 몸통을 받쳤던 귀부(龜趺)와 위를 장식하였던 이수(螭首)가 있다. 이 이수의 전면 중앙부에 태종 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이 무덤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게 되었다.

대규[大逵]  대로. 큰길. 아홉 대의 수레가 나란히 갈 수 있는 길이다.

대규[大圭]  丁자형으로 된 패옥(佩玉)이다. 홀(笏)처럼 허리띠 사이에 꽂아놓고 무슨 일이 있을 때 잊어버릴 것을 대비하여 거기에다 기록해두는 용도로 사용한다.

대규[戴逵]  대규는 동진(東晉) 사람으로 자(字)는 안도(安道)이다. 초군(譙郡: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호현毫縣) 사람이다. 북과 거문고 등 악기를 잘 다루었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나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품이 고상하여 당대의 명사인 사안(謝安)·사현(謝玄)·왕순(王珣)·왕휘지(王徽之) 등에게 존경을 받았다.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반대하여 석의론(釋疑論)을 지었다. 만년에는 회계(會稽)의 섬현(剡縣)에서 살았다. 대규집(戴逵集) 9권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는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에 “산음(山陰)에 살던 왕휘지가 어느 겨울날 밤에 눈이 펑펑 내리자, 흥에 겨운 나머지 멀리 섬계(剡溪)에 살고 있는 친구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 밤새 배를 저어 그의 집 문 앞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정작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시 발길을 돌려 되돌아왔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내 본디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온 것이다.[吾本乘興而行 興盡而返]’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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