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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戴聖], 대성[臺省], 대성[大聖]


대성[戴聖]  전한(前漢)) 때의 학자로, 자는 차군(次君)이며, 숙부 대덕(戴德)과 함께 후창(后蒼)에게 예를 배웠다. 금문예학(今文禮學)인 소대학(小戴學)의 개창자로, 선제(宣帝) 때 박사가 되었으며, 관직이 구강태수(九江太守)에 이르렀다. 석거각(石渠閣) 회의에 참석하여 오경(五經)을 강론하였다. 대덕과 구별하기 위해 소대(小戴)라 일컬어졌다. 대덕의 대대례기(大戴禮記) 중에서 고대의 각종 예의(禮儀)와 관련된 논술 49편을 뽑아 소대례기(小戴禮記)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예기(禮記)이다.

대성[戴聖]  소대(小戴)라고도 한다. 자는 차군(次君)이며 양인(梁人)이다. 서한(西漢)의 금문경학가(今文經學家)로서 구강태수(九江太守)에 임명되었다. 숙부인 대덕(戴德)과 함께 후창(后蒼)에게 수학하였다. 소대파(小戴派) 예학의 개창자가 되었다. 선제(宣帝) 때 학관(學官)의 예경학박사가 되었다. 고대로부터 전래된 예와 관련된 문헌을 정리하여 모두 49편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소대례기(小戴禮記)이다. 이 책은 광범위하게 유통되어 예기(禮記)하면 바로 이 책을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즉 현재의 십삼경(十三經)에 포함된 예기(禮記)가 바로 이 소대례기(小戴禮記)이다. 남송(南宋) 도종(度宗) 때 고성백(考城伯)에 봉해졌다.

대성[戴聖]  전한(前漢) 때 사람으로, 대대례기(大戴禮記)를 편찬한 숙부 대덕(戴德)과 함께 금문예학(今文禮學)을 연구하였다. 대덕을 대대(大戴), 대성을 소대(小戴)라고 부른다. 한 선제(漢宣帝) 때 박사(博士)가 되어 석거각(石渠閣) 회의에 참여하여 오경(五經)의 이동(異同)을 정하였다. 전국 시대 때부터 한나라 초기까지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예(禮)에 관한 논저들을 모아 소대례기(小戴禮記)를 편찬하였다. 구설(舊說)에 따르면, 소대례기는 뒤에 후한(後漢) 정현(鄭玄)이 여기에 주석을 달면서 의례(儀禮)의 해설서라는 지위에서 벗어나 예기(禮記)라는 독립적인 책이 되었다고 한다.

대성[臺省]  고려(高麗) 때 어사대(御史臺)의 대관(臺官)과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성랑(省郎)을 함께 부른 명칭이다.

대성[臺省]  관제의 하나. 대간(臺諫)으로, 원래 상서성(尙書省)의 이칭(異稱)인데, 조선조에는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 대한 총칭이다.

대성[臺省]  당대(唐代)의 중앙 요직으로, 대성(臺省)의 대(臺)는 대원(臺院)·전원(殿院)·찰원(察院) 등의 어사대(御史臺)를 말하고, 성(省)은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상서성(尙書省)의 3성(三省)을 말하는데, 이들 관직은 모두 청요직(淸要職)으로 일컬어진다.

대성[大聖]  대성은 대성인(大聖人)으로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대성[大聖]  맹자(孟子) 진심 하(盡心下)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람을 선인(善人)이라 하고, 자기 몸에 선을 소유한 것을 신인(信人)이라 하고, 선을 충실히 보유한 것을 미인(美人)이라 하고, 충실하여 빛남이 있는 것을 대인(大人)이라 하고, 대인이면서 저절로 화한 것을 성인(聖人)이라 하고, 성인이어서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신인(神人)이라 한다.[可欲之謂善 有諸己之謂信 充實之謂美 充實而有光輝之謂大 大而化之之謂聖 聖而不可知之之謂神]”라고 하였는데, 그 대주에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대(大)는 해서 될 수 있지만, 화(化)는 인위적으로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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