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大晟] 대성은 북송(北宋) 때 음악을 관장하던 관청인 대성부(大晟府)에서 정리하고 제작한 악곡(樂曲)을 가리킨다. 철위산총담(鐵圍山叢談)에 “처음에 단주(端州)에서 송 성공(宋成公)의 종을 올린 뒤에 대성을 만들었다.[始端州上宋成公之鐘, 而後得以作大晟.]”라고 하였다.
대성[大成]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공자 같은 분을 모든 성인의 지덕을 모아서 크게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니, 집대성이란 바로 음악을 연주할 때 금속 악기로 발성을 시작하여 옥의 악기로 소리를 거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금으로 소리를 낸다는 것은 처음의 조리요, 옥으로 거둔다는 것은 마침의 조리이니, 처음의 조리는 지혜의 일이요, 마침의 조리는 성의 일이다.[孔子之謂集大成 集大成也者 金聲而玉振之也 金聲也者 始條理也 玉振之也者 終條理也 始條理者 智之事也 終條理者 聖之事也]”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 주(註)에 “성(成)은 음악이 한 번 마무리되는 것이다.[成者, 樂之一終] 여러 음악의 작은 완성품들을 모아서 하나의 큰 완성품[大成]을 만든다.[則合衆小成而爲一大成]”라고 하였다.
대성[大姓] 명문가(名門家). 후손이 번성한 성씨. 지체가 높은 집안의 성씨.
대성[戴星] 별을 머리 위에 이고 있다는 뜻으로, 아침 일찍 집을 나가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옴의 비유(比喩). 공무 때문에 일찍 출근하여 늦게 퇴근하는 것을 이른다. 무마기(巫馬期)는 공자(孔子)의 제자인데, 설원(說苑) 정리(政理)와 여씨춘추(呂氏春秋) 찰현(察賢)에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 단보)를 다스릴 때 그저 거문고만 타고 몸이 공당(公堂)에서 내려오지 않았는데도 선보가 잘 다스려졌다. 무마기(巫馬期)도 선보를 다스릴 때 별을 이고 나가고 별을 이고 들어가 밤낮으로 쉬지 않고 몸소 일을 처리하였는데 선보가 역시 잘 다스려졌다.[宓子賤治單父, 彈鳴琴, 身不下堂, 而單父治. 巫馬期亦治單父, 以星出(戴星出), 以星入(戴星入), 日夜不處(居), 以身親之, 而單父亦治.]”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대성[大星] 별자리 중 크고 밝은 것을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시 동방반명(東方半明)에 “동쪽이 밝아지자 빛나던 별들이 사라지고, 태백성만 지는 달과 함께 남아 있네.[東方半明大星沒, 獨有太白配殘月]”라고 하였다. 상대적으로 소성(小星)은 작고 반짝이는 별을 가리킨다.
대성[臺城] 육조(六朝) 때의 황궁(皇宮)으로, 그 터가 지금의 남경시(南京市) 현무호(玄武湖) 주변에 있다. 본래는 오(吳)나라 후원(後苑)의 성(城)이었는데 동진(東晉) 때 수축(修築)해 새 궁전을 지어 궁성(宮城)이라고 하였다. 송(宋)·제(齊)·양(梁)·진(陳)도 이를 따라 모두 궁(宮)이라고 했는데 계명산(鷄鳴山)과 접해 있다. 동진(東晉)·송(宋) 시대(時代)에 조정금성(朝廷禁省 궁궐과 그 안의 관아)을 대(臺)라 했으므로 대성(臺城)이라 한 것이다. 원성(苑城)이라고도 한다.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불교를 숭상하여 모든 제사에 동물 희생을 없애고 밀가루로 빚어 대신하게 하는 등, 인자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였으나 후경(侯景)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반신(叛臣) 후경(侯景)의 포위를 당하여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었다.
대성[臺城] 동진(東晉)과 남조(南朝) 때 궁궐이 있던 성으로 둘레는 8리에 달했으며, 건강궁(建康宮) 혹은 궁성(宮城)이라고도 하였다. 현재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에 그 터가 있다. <南朝五史辭典 臺城> 대성(台城). 당시에는 조정금성(朝廷禁省), 즉 궁성을 대(台)라고 불렀다.
대성[大聲]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정대한 음악은 시골 사람의 귀에 들어가지 않고, 절양(折楊)과 황과(皇荂)를 부르면 입을 벌리고 웃는다.[大聲不入於里耳, 折楊皇荂, 則嗑然而笑.]”라고 하였는데, 대성은 고대 성왕(聖王)의 음악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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