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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장군[大袖長裙], 대수장군[大樹將軍]


대수장군[大袖長裙]  큰 소매에 긴 치마. 소매가 큰 긴 치마. 오례의(五禮儀)에서는 대수(大袖)를 장삼(長衫)이라고 했다. 부인의 옷인 단삼과 같으나 넓고 커서 길이가 무릎까지 온다. 소매의 길이는 2자 2치이다. 가례(家禮) 상례(喪禮) 참최(斬衰)에 “부인은 굵은 생포를 사용하여 대수와 장군과 개두를 만드는데 모두 꿰매지 않는다. 포두수와 죽차, 마구를 한다.[婦人則用極粗生布 爲大袖長裙蓋頭 皆不緝 布頭竹釵麻屨]”라고 하였다.

대수장군[大樹將軍]  매사(每事)에 겸손(謙遜)하고 말없이 수고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대수장군(大樹將軍) 풍이(馮異)에 관한 고사로, 보통 장수(將帥)를 지낸 이를 추모할 때 사용하는 비유이다. 풍이대수(馮異大樹). 공손대수(公孫大樹). 대수지공(大樹之功).

대수장군[大樹將軍]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공신(功臣)인 풍이(馮異)를 이른다. 맹진장군(孟津將軍)이 되어 양하후(陽夏侯)로 추봉(推封)되었다. 통감절요(通鑑節要) 동한기(東漢紀)에 “유수(劉秀)가 관리와 병졸들을 나누어서 각각 제군(諸軍)에 예속시킬 때에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수장군(大樹將軍)에게 소속되기를 원한다.’라고 하니, 대수장군(大樹將軍)은 편장군(偏將軍) 풍이(馮異)였다. 사람됨이 겸손하고 공로를 자랑하지 않아서 관리와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적과 교전하거나 적의 침공을 받은 경우가 아니면 항상 여러 군영의 뒤에 있게 하고, 매번 머무는 곳에서 제장(諸將)들이 함께 공(功)을 논하면 풍이(馮異)는 항상 홀로 나무 아래로 물러가 있었다. 그러므로 군중에서 그를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 불렀다.[秀部分吏卒, 各隷諸軍, 士皆言願屬大樹將軍. 大樹將軍者, 偏將軍馮異也, 為人謙退不伐, 敕吏士非交戰受敵, 常行諸營之後. 每所止舍, 諸將並坐論功, 異常獨屏樹下, 故軍中號曰大樹將軍.]”라고 하였다. 전공을 세우고도 논공행상(論功行賞)하는 대열에 끼지 않고 뒤에서 기다린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대수장군[大樹將軍]  후한(後漢)의 풍이(馮異)는 자(字)가 공손(公孫)이고, 영천군(潁川郡) 부성현(父城縣)사람으로 좌씨춘추(佐氏春秋),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능통했다.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군연(郡掾)으로서 5개 현을 감독하였으나 한나라 부흥군에게 사로잡혀 사촌형 풍효(馮孝)의 친구인 정침(丁綝), 여안(呂晏)의 천거로 부성현 현장인 묘맹과 함께 후일의 광무제인 유수(劉秀)에게 귀의하였다. 그 후 유수(劉秀; 光武帝)를 도와 후한(後漢)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卷17 풍이전(馮異傳)에 “풍이는 사람됨이 겸손하고 스스로를 낮추어 길을 가다가도 여러 장수와 서로 마주치면 수레를 끌고 길을 피하였다. 나아가고 물러남에 모두 일정한 곳이 있어 군중에서는 그를 정제(整齊; 단정한 사람)라고 불렀다. 항상 정 위치에 있었으며, 여러 장군들이 같이 앉아 공을 자랑할 때 풍이는 홀로 나무 아래 물러나 있음으로, 군중(軍中)에서는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 명했다. 한단(邯鄲)을 격파하고, 부대를 재편성하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다시 배속시킬 때 군사들이 모두 대수장군의 휘하에 속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광무제가 이로써 그가 인망이 많음을 알고 그를 소중 여겼다.[異為人謙退不伐, 行與諸將相逢, 輒引車避道. 進止皆有表識, 軍中號為整齊. 每所止舍, 諸將並坐論功, 異常獨屏樹下, 軍中號曰; 大樹將軍. 及破邯鄲, 乃更部分諸將, 各有配隸, 軍士皆言願屬大樹將軍, 光武以此多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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