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지풍[大王之風] 전국 시대 굴원(屈原)의 제자인 송옥(宋玉)이 초 양왕(楚襄王)의 교만과 사치를 풍자할 목적으로 풍부(風賦)라는 글을 지으면서, 바람을 대왕지풍(大王之風)과 서인지풍(庶人之風)으로 구분하였는데, 후대에는 보통 제왕의 뜻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文選 卷13>
대왕포[大王浦] 부여현 남쪽 7리쯤에 있다. 백제의 무왕(武王)이 매번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자하(泗泚河) 북쪽 물가에서 술을 마시며 즐겼는데, 취해서는 반드시 거문고를 뜯으며 스스로 노래하고 시종하는 자들에게 일어나 춤추게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대왕포라 일컬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8 忠淸道 扶餘縣>
대왕풍[大王風] 초(楚) 나라 송옥(宋玉)이 지은 풍부(風賦)에 바람을 대왕풍[雄風]과 서인풍(庶人風[雌風])으로 나누어 호화로운 왕이 사는 곳에 부는 바람은 웅풍(雄風)이요, 곤궁한 백성들의 집에 부는 바람은 자풍(雌風)이라 하여 풍자하였다.
대외[大隗] 대외는 옛날 중국의 산신령 이름이다. 황제(黃帝)가 일곱 사람을 거느리고 구자산(具茨山)으로 가서 대외를 만나 보려고 하다가, 양성(襄城)의 들판에 이르러 일곱 사람이 모두 길을 잃었는데, 마침 어떤 동자를 만나 구자산과 대외가 있는 곳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莊子 徐无鬼>
대외[大隗] 산 이름. 하남성 우현(禹縣)의 북쪽, 지금의 태외산(泰隗山)또는 구자산(具茨山)이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황제(黃帝) 대외(大隗)를 구자(具茨)에서 볼 때 방명이 수레를 어거하고, 창우(昌寓) 곁말에 타고, 장약(張若) 습붕(慴朋)이 앞 말에 타고, 곤혼(昆閽) 활계(滑稽)가 수레 뒤에 따랐다. 양성(襄城)의 들에 이르러 칠성(七聖)이 모두 아득해졌으나, 길 물을 곳이 없었다는 고사에서 나온다.
대외소회[大畏小懷] 서경(書經) 무성(武城)에 “큰 나라는 그 힘을 두려워하고 작은 나라는 그 덕을 사모하였다.[大邦畏其力 小邦懷其德]”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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