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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당가[對酒當歌]~대주이보[大珠以報]~대주첩[代柱帖]~대주혜해[大珠慧海]


대주논문기[對酒論文期]  멀리 있는 다정한 친구를 그리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보(杜甫)의 시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에 “위수 북쪽엔 봄날의 숲이요, 강 동쪽엔 해 저문 구름이로다. 언제나 한 동이 술로 서로 만나서, 거듭 함께 글을 자세히 논해 볼까.[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대주당가[對酒當歌]  위무(魏武)는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무제(武帝)인 조조(曹操)를 가리킨다. 조조의 단가행(短歌行)에 이르기를 “술을 마주하여서는 노래 불러야만 하니, 우리 인생 그 얼마나 살 수 있으랴.[對酒當歌 人生幾何]”라고 하였는데, 이는 제때에 놀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대주산[大珠山]  산동(山東) 교주(膠州) 남쪽 120리 지점에 천 길 절벽으로 우뚝 서 있으며, 샘물이 맑아 옥천산(玉泉山)이라고도 한다. 해변에 석실(石室)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晉)나라 진중거(陳仲擧)가 이곳에 숨어 살며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山東通志 卷6 萊州府> <明一統志 卷25 萊州府> <大淸一統志 卷138 萊州府>

대주신어상[大註信於上]  대주는 관본(官本) 경서(經書)에 큰 글자로 쓰인 주자(朱子)의 집주(集註)를 가리킨다. 집주(集註)에 “차라리 죽을지언정 백성들에게 신(信)을 잃지 아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또한 차라리 죽을지언정 위정자에게 신을 잃지 않게 하여야 한다.[寧死而不失信於民 使民亦寧死而不失信於我也]”라고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대주이보[大珠以報]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 ‘수후의 구슬[隋侯之珠]’에 대한 고유(高誘)의 주(註)에 “수후는 큰 뱀이 큰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약을 발라 주었더니, 뒤에 뱀이 강 속에서 큰 구슬을 물고 나와 은덕을 갚았다.[隋侯見大蛇傷斷 以藥傅之 後蛇於江中銜大珠以報之]”라고 하였다.

대주첩[代柱帖]  당(唐)나라 선종(宣宗)이 사냥을 나갔다가 농부에게서 그곳의 현령(縣令) 이행언(李行言)이 정치를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환궁한 뒤 침전(寢殿) 기둥에다 그의 이름을 적어두고는 뒤에 높은 벼슬에 제수하였다는 고사가 있는데, 숙종이 이를 본받아서 하나의 첩자(帖子)를 만들어 이름을 대주첩이라 하고 별도로 포폄(褒貶)을 받은 수령(守令)을 기록하여 수시로 열람하였다. <肅宗實錄 附錄 行狀>

대주해[大珠海]  당(唐) 사문(沙門) 혜해(慧海)인데 속성은 주(朱)요, 건주인(建州人)으로 월(越) 대운사(大雲寺) 도지화상(道智和尙)에게 귀의하여 수업하였으며 강서(江西)에 이르러 마조(馬祖)에게 참알(參謁)하여 깨침을 얻었다. 마조는 중(衆)에게 이르기를 “월(越)에 대주(大珠)가 있어 원명광투(圓明光透)하고 자재(自在)하여 가리고 막힌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 중들 가운데 사(師)의 성이 주씨임을 아는 자가 있어 서로서로 추식(推識) 결계(結契)하여 당시에 대주화상(大珠和尙)이라 호하였다.

대주행[對酒行]  악부 상화가사(相和歌辭)의 곡 이름이다. 당나라 이백(李白)의 작품이 유명하다.

대주혜해[大珠慧海]  조주(趙州: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의 대주혜해(大珠慧海)는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법을 이었다. 속성이 주씨(朱氏)로 건주(建州: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건구建甌) 사람이었다. 초기에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의 도지화상(道智和尙)에게서 배우다가 강을 건너 마조를 참배한 후에 마음에 대한 요체를 깨달았다. 마조를 만나 깨달음을 얻게 된 인연이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6과 오등회원(五燈會元) 권3에 실려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대주혜해에 대한 기록이 없다. 생졸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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