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승[德勝]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복양시(濮陽市) 복양현(濮陽縣)이다.
덕승재위군자 재승덕위소인[德勝才爲君子 才勝德爲小人]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 주기(周紀) 위열왕(威烈王) 23년에 “덕이 재주보다 나으면 군자이고, 재주가 덕보다 나으면 소인이다.[德勝才謂之君子 才勝德謂之小人]”라고 하였다.
덕승지전[德勝之戰] 덕승(德勝)은 황하 가에 있던 고성(古城)의 이름으로 덕승채(德勝寨), 협채(夾寨)라고도 불렀다. 후양(後梁) 정명(貞明) 4년(918) 12월에 진왕(晉王) 이존욱(李存勗)이 복양(濮陽)을 취하였고, 그 다음 해에 진장(晉將) 이존심(李存審)이 덕승(德勝)에서 황하(黃河)를 끼고 남북쪽에 두 개의 성을 쌓았다. 그 후 용덕(龍德) 3년(923)에 왕언장(王彥章)이 군사를 이끌고 기습하여 진군(晉軍)이 성의 방어를 위해 만들어놓은 쇠사슬과 부교를 파괴하고 남성(南城)을 급습하여 함락시켰다.
덕양[德陽] 고양(高陽)의 옛 지명이다. 사신의 행차가 고양에 도착하면 벽제관(碧蹄館)에서 묵었다.
덕양유고[德陽遺稿]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기준(奇遵)의 저서이다. 기준의 자는 경중(敬仲), 호는 복재(服齋)·덕양(德陽)이며,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중종 초기 문과에 급제한 이후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 정자로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다음, 검토관(檢討官), 수찬(修撰), 검상(檢詳), 장령(掌令)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가 그 후 끝내 유배지에서 교살(絞殺)되었다고 한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덕어기금[德於夔琴] 기(夔)가 거문고로 연주한 지극한 덕. 기는 순 임금 때의 명신으로 음률에 밝아 음악을 관장하였다. 거문고로 연주한 지극한 덕은 서경(書經) 익직(益稷)의 “명구(鳴球)를 치며 거문고와 큰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읊으니, 조고(祖考)의 영혼이 와서 강림하시며 우빈(虞賓)이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제후들과 덕(德)으로 사양합니다. 당하(堂下)에는 관악기와 도고(鼗鼓)를 진열하고, 음악을 합하고 멈추되 축(柷)과 어(敔)로 하며 생(笙)과 용(鏞)을 번갈아 울리니, 새와 짐승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소소(簫韶)를 아홉 번 연주하자 봉황이 와서 춤을 춥니다.[戞擊鳴球, 搏拊琴瑟以詠, 祖考來格, 虞賓在位, 群后德讓. 下管鼗鼓, 合止柷敔, 笙鏞以間, 鳥獸蹌蹌, 簫韶九成, 鳳凰來儀.]”라는 내용을 인용한 것인바, 주자(朱子)는 집전(集傳)에 “순(舜)의 덕(德)이 위에서 화(和)함을 이루고 기(夔)의 음악이 아래에서 화(和)함을 부르니, 신(神)과 사람을 감동시키고 짐승과 봉황을 춤추게 한 것을 어찌 의심하겠는가.”라고 주하였다. 도고(鼗鼓)는 작은북이며 용(鏞)은 큰북이다. 우빈(虞賓)은 우(虞)나라의 손님이란 뜻으로 요 임금의 아들인 단주(丹朱)를 가리키는바, 우나라는 순 임금의 국명이다. 요 임금은 아들 단주가 어질지 못하다는 이유로 순 임금에게 전위하였는데, 단주가 이에 불만을 품지 않고 이 자리에 참여하여 여러 제후들과 화기애애하게 덕(德)으로 서로 사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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