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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지환[德宗之患], 덕즉불경[德則不競], 덕지기[德之棄], 덕지지[德之至]


덕종[德宗]  당(唐)나라 9대 황제 이괄(李适)로, 시호는 신무효문황제(神武孝文皇帝)이다. 숙종(肅宗)의 장손이자 대종(代宗)의 장남으로, 사조의(史朝義)를 토벌하고 하북(河北)을 평정한 공으로 상서령(尙書令)이 된 뒤 태자가 되었다. 즉위한 뒤에는 양염(楊炎)을 등용하여 조용조(租庸調) 제도를 폐하고 양세법(兩稅法)을 시행하며 번진(藩鎭)을 억제하는 등 중흥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건중(建中) 4년에 경원(涇原)에서 병변(兵變)이 발생하여 봉천(奉天)으로 도주한 뒤 번(藩)의 독립을 승인하여 이후 번진(藩鎭)이 득세하는 빌미가 되었다. 말기에는 환관에게 국정을 맡기고 갖가지 명목으로 증세(增稅)를 하여 백성의 원성을 샀다.

덕종[德宗]  당나라 제9대 임금으로 휘는 괄(适)이다. 제8대 임금 대종(代宗) 이예(李豫)의 장자이다. 시호는 신무효문황제(神武孝文皇帝)이다. 대종(代宗) 광덕(廣德) 2년(764)에 황태자에 책립되었다. 즉위한 초기에는 환관의 정사 간여를 엄금하고 양염(楊炎)을 재상으로 임명하며 조용조(租庸調) 제도를 혁파하고 여름과 가을 두 계절에 세금을 나누어 받는 양세법(兩稅法)을 만들어 중흥의 기상이 있었으나 뒤에 노기(盧杞) 등을 등용하면서 정사가 어지러워졌다. 783년에 경원병변(涇原兵變)이 일어나 봉천(奉天)으로 피하였다가 이듬해 난이 평정된 뒤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문무백관들의 배신과 환관의 충성스러운 호종을 겪게 되자 이후 점차 환관을 중용하여 혼란을 초래하였다.

덕종지환[德宗之患]  당 덕종(唐德宗) 건중(建中) 4년(783) 10월에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켰다. 덕종(德宗)이 경원절도사(涇原節度使) 요영언(姚令言)에게 명하여 고전하고 있는 가서요(哥舒曜)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요영언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요영언의 반란군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주차(朱泚)가 군대를 거느리고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을 침범하여, 덕종(德宗)이 봉천(奉天)으로 피난까지 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주차의 군대가 봉천까지 추격하여 성을 공격하는 바람에 덕종이 다급한 위기를 맞았으나, 그해 11월에 구원병이 이르러 가까스로 화를 면했다. 이를 경원병변(涇原兵變)이라 한다. <舊唐書><新唐書>

덕즉불경[德則不競]  덕행(德行)이 쇠(衰)함. 불경(不競)은 쇠퇴(衰頹)의 뜻이다.

덕지기[德之棄]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길에서 주워들은 말을 길에서 전하는 것은 덕을 저버리는 것이다.[道聽而塗說, 德之棄也.]”라고 하였다.

덕지지야[德之至也]  덕의 지극함이다.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맹자(孟子) 진심 하(盡心下)에 “행동거지와 일처리가 예(禮)에 맞게 하는 자는 성덕(盛德)이 지극한 자이니, 죽음 앞에 곡(哭)을 하며 슬퍼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를 위함이 아니요, 덕(德)을 떳떳하게 잡고 굽히지 않는 것은 녹(祿)을 구하기 때문이 아니며, 말을 함에 반드시 신(信)있게 하는 것은 행실을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다.[動容周旋中禮者, 盛德之至也. 哭死而哀, 非爲生者也. 經德不回, 非以干祿也. 言語必信, 非以正行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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