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곡[道曲] 당(唐) 나라 때의 교방곡敎坊曲의 이름이다.
도곡[陶穀] 도곡은 송(宋) 나라 신평(新平) 사람으로 자는 수실(秀實)이다. 후주(後周)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냈고, 송 태조(宋太祖)가 등극한 후 예부(禮部)·형부(刑部)·호부(戶部)의 상서(尙書)를 역임하였으며, 청이록(淸異錄) 2권을 찬하였다. 청이록(淸異錄)에 “사방에서 남해를 풍류의 고장이라고 일컫는데, 풍속이 음란함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지금 서울에 몸을 파는 점포가 1만여 호에 이르는데, 심지어 남자들이 제 몸을 팔면서 거리낌 없이 나다녀 드디어 벌집거리를 이루었으니, 풍류거리로 그칠 정도가 아니다.[四方指南海爲烟月作坊 以言風俗尙淫 今京師鬻色戶將及萬計 至於男子 擧體自貨 進退恬然 遂成蠭窠巷陌 又不止烟月作坊也]”라고 하였다. 또, 태위(太尉) 당진(黨進)의 집에서 가기(歌妓)를 데려온 뒤에, 눈을 녹인 물에 차를 달여 마이며 “당 태위의 집에 있을 때는 이런 풍류를 몰랐을 것이다.”라고 자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宋稗類鈔 卷15 豪曠 第25> <淸異錄 卷上 蠭窠巷陌> <宋史 卷269 陶穀傳>
도곡[陶谷] 도실·도곡(道谷)으로도 쓴다. 경상남도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雲谷里)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경내에는 농암 이현보 선생을 향사한 분강서원(汾江書院)과 농암종택의 사랑채 건물인 긍구당(肯構堂), 영천 이씨의 재궁인 도곡재사(道谷齋舍)가 있었다.
도곡다[陶穀茶] 송(宋)나라 도곡(陶穀)이 눈 오는 날에 미인을 데리고 눈물[雪水]에 차를 다려 마시는데 미인은 전 당태위(黨太尉)집에 있던 사람이었다. 묻기를 “당태위도 이런 운치를 알던가.”라 하니, 미인은 “그는 비단 장막 안에서 고아주(羔兒酒)를 마시면서 우리들더러 나직히 노래 부르라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도곡풍광호[陶穀風光好] 북송(北宋) 때 도곡(陶穀)이 사신으로 남당(南唐)에 가서 스스로 상국(上國)의 사자(使者)임을 자부하여 의연한 태도를 보였는데, 그곳의 학사(學士) 한희재(韓熙載)가 기녀 진약란(秦蒻蘭)을 역졸(驛卒)의 딸인 것처럼 도곡에게 소개하여 도곡이 마침내 신독(愼獨)의 경계를 망각하고 그녀와 가까이 지내면서 풍광호(風光好) 한 사곡(詞曲)을 지어주기까지 했다가, 그 후 남당의 후주(後主)가 도곡을 위하여 베푼 주연(酒宴)에서 후주가 기녀 진약란으로 하여금 풍광호(風光好)를 노래하며 도곡에게 술을 권유하도록 하자, 도곡이 그제야 속은 것을 깨닫고 군색한 처지가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도곤[睹閫] 안방을 엿보았다는 것은 공부를 통해 이치의 가장 심오한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말한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자로(子路)는 마루에는 올랐으나 아직 방에는 들어오지 못했다.[由也 升堂矣 未入於室也]”라고 하여 학문의 진보를 집에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도골청[道骨靑] 옛날 장자문(蔣子文)이란 사람이 술과 여색(女色)을 절제 없이 즐기면서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의 뼈는 이미 푸르러졌으니, 죽으면 응당 신선(神仙)이 될 것이다.[常自謂己骨靑 死當爲神]”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선골(仙骨)을 가리킨다. <搜神記 卷5>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 산인권주(山人勸酒)에 “뼈는 청색이요 골수는 녹색으로 늘 아름답고 좋으니 진나라 때 속세를 피해 숨은 사람이라 하네.[骨靑髓綠長美好 稱是秦時避世人]”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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