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공류[陶公柳] 진(晉)나라 도간(陶侃)이 무창태수(武昌太守)로 있을 때 병사들을 시켜 군문 앞에 심은 버드나무를 가리킨다. 진서(晉書) 도간전(陶侃傳)에 “도간이 일찍이 관영마다 버드나무를 심게 했는데 도위 하시가 관청에 심은 버드나무를 훔쳐다 자기 집 문 앞에 심었다. 도간이 나중에 보고 수레를 세우고 ‘이것은 무창 서문 앞에 있던 버드나무인데 어떤 연유로 훔쳐다 이곳에 심었느냐?’라고 물으니, 하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죄를 빌었다.[侃嘗課諸營種柳, 都尉夏施盜官柳植之於己門. 侃後見, 駐車問曰: 此是武昌西門前柳, 何因盜來此種, 施惶怖謝罪.]”라고 하였다. 무창류(武昌柳)라고도 한다.
도공문이[徒空文耳] 한갓 빈 문서일 뿐이라는 뜻으로, 당 덕종(唐德宗)이 사냥을 나갔다가 백성인 조광기(趙光奇)의 집에 들어가 “백성들의 생활이 즐거운가?[百姓樂乎?]”라고 물으니, 조광기(趙光奇)가 대답하기를 “즐겁지 않습니다.[不樂.]”라고 하였다. 덕종이 “금년에 자못 곡식이 잘 여물었는데, 어찌하여 즐겁지 않은가?[今歲頗稔, 何為不樂?]”라고 하니, 조광기(趙光奇)가 “조령(詔令)이 신의가 없습니다. 이전에는 ‘양세(兩稅) 외에는 다른 부역이 모두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 양세(兩稅)에 속하지 않으면서 관부에서 가렴주구하는 것이 양세보다 더 많고, 이후에는 또 ‘화적(和糴)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관부에서 강제로 탈취해 가고 우리들에게 1전도 준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관부에서 사들이는 곡식과 보리를 연도(沿道)에서 바치게 한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경서행영(京西行營)으로 보내게 하여 번번이 수백 리 거리가 되니, 이것을 운반하느라 수레가 부서지고 소가 죽어서 파산(破産)하여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근심과 괴로움이 이와 같은데,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매번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백성들을 우대하고 구휼한다고 하나 한갓 빈 문서일 뿐이니, 성상께서는 구중궁궐에 깊이 거처하시어 이러한 사정을 다 알지 못하시는 듯합니다.[詔令不信. 前雲兩稅之外悉無它徭, 今非稅而誅求者殆過於稅. 後又雲和糴, 而實強取之, 曾不識一錢. 始雲所糴粟麥納於道次, 今則遣致京西行營, 動數百里, 車摧牛斃, 破產不能支. 愁苦如此, 何樂之有! 每有詔書優恤, 徒空文耳! 恐聖主深居九重, 皆未知之也!]”라고 대답하였다. <資治通鑑 唐紀>
도공사[陶公梭] 도공은 도간(陶侃)을 말하고 북[梭]은 용(龍)이라는 뜻이다. 진서(晉書) 권16 도간전(陶侃傳)에 “도간이 젊었을 때 뇌택(雷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북[梭] 하나가 그물에 걸려나왔으므로 벽에 걸어 놓았더니, 조금 있다가 우레치고 비가 쏟아지면서 용으로 변하여 갔다.[侃少時漁於雷澤, 網得一織梭, 以掛於壁. 有頃雷雨, 自化為龍而去.]”라고 하였다.
도공사인[逃空思人] 아는 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 소식이 그리워지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 “텅빈 골짜기에 도망친 사람, 쑥대가 우거져 작은 짐승 다니는 길도 막아 버린 공지에서 서성거리노라면, 사람의 발소리만 들어도 기뻐하는 법이다. 그러니 더구나 형제와 친척들의 기침 소리가 그 옆에서 들리는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夫逃空虛者, 藝霍柱乎選题之, 跟位其空, 聞人足音然而喜矣. 又況乎昆弟親戚之警效其側者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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